산업통상자원부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의 청산절차를 밟고 있는 가운데, 연구원 측이 절차의 위법성을 주장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청산을 둘러싼 갈등이 결국 법정 공방으로 번지면서, 정부와 산하 연구기관 간 이례적인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다.
20일 정부에 따르면 최근 대전지방법원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측이 지난달 16일 산업부를 상대로 제기한 ‘기관설립 허가 취소’ 결정 취소 소송을 접수하고 본안 심리에 착수했다. 현재 양측 입장이 법원에 제출된 상태로, 첫 변론기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설립 목적 달성 불가’ 산업부 판단에 연구원 “기획 해산”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은 2010년 4월 한국봉제기술연구소(2004년 설립)와 한국패션센터(2000년 설립)의 기능을 통합하며 탄생한 국내 유일의 패션·봉제산업 전문 연구기관이다.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대구광역시, 경상북도가 각각 60억원, 40억원, 10억원을 투입해 설립한 후 법적으로 산업부의 감독을 받아왔다. 대구 지역의 섬유패션산업을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아, 시제품제작 등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지원(2021년 기준 1675건) 등을 이어왔다.
하지만 산업부는 올해 2월 27일 자로 연구원에 대해 전문생산기술연구소·비영리법인 설립 허가를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경영진 부재와 다수 직원 퇴사 등으로 설립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연구원은 2019년 3월 주상호 원장이 임기를 2년 앞두고 중도 사임한 이후부터 줄곧 원장 공석 상태로 운영돼 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두고 연구원과 정부의 대립이 이어졌다.
정부는 주 원장이 노조의 반발로 사임했으며, 신임 원장 선임을 위해 원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할 이사와 감사 또한 공석인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10명 있던 선임직 이사가 전부 사임을 했는데, 이들이 있어야 원장을 새로 선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연구원 측은 이사회에서 경영능력 평가를 통해 주 원장에게 사직을 권고한 것일 뿐 노조와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후 이사 등 후보를 추려 산업부에 보고했음에도 이사 선임을 허가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산업부는 2023년 법원에 임시이사 선임을 신청해 지난해 초 산업부·대구시 등 관계자 6명으로 구성된 임시이사회를 꾸렸다. 연구원의 설립 해산 결정은 이 임시이사회에서 내려졌다.
연구원 측은 산업부의 해산 결정 과정에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됐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공석인 원장을 대신해 방어권을 행사할 직무대행을 지명하지 않았고, 임시이사회 운영 기간 동안 ‘연구원 정상화’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기관 해산이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형식적 절차만 거쳤다는 얘기다.
연구원 관계자는 “산업부가 모든 행정 절차에서 내부 직원이나 연구원 법인이 문제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며 “이사회 구성도 산업부의 예산과 감독을 받는 인물들로 채워져 결국 산업부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앞서 직원들은 지난 3월 연구원 명의로 설립 허가 취소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과 취소 소송을 냈으나, 원고 적격이 인정되지 않아 모두 각하됐다. 대신 연구원의 지원을 받아온 봉제업체가 제기한 소송이 법원에 받아들여졌다.
◇ 정부 보조금 끊긴 후 본격화한 경영난 ‘네탓 공방’
산업부는 연구원이 장기간 실질적인 연구·기업 지원 활동을 하지 못했고, 부채가 급증했다는 점도 해산 사유로 들고 있다. 다만 연구원 측은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 중단이 경영난의 원인이라고 맞서고 있다.
먼저 정부가 2018년 연구원을 포함한 다수의 전문생산기술연구소에 대한 지원 사업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연 3억원대의 산업부 지원이 중단됐다.
정부 보조금이 끊긴 이후 연구원은 2019년부터 임금 체불 문제를 겪었다. 결국 2022년 법원으로부터 통장압류·채권추심 명령을 받았고, 대구시는 이때부터 “통장압류로 민간위탁금과 보조금 사업비 집행이 불가능하다”며 연 40억원가량의 지원을 끊었다.
연구원 관계자는 “관행적으로 대구시 사업비에서 인건비 예산을 130%로 책정하고, 30% 초과분을 기관 운영경비로 써왔지만 대구시가 2019년부터 이를 막았다”면서 “산업부 보조금도 운영경비로 써왔던 만큼, 운영이 마비가 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산업부와 대구시가 서서히 연구원을 말려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부 관계자는 “같이 지원이 끊긴 다른 연구소는 다른 사업을 수주해 수입원을 대체하는 데 성공했고, 패션연구원은 이에 실패한 것”이라고 했다.
연구원의 부채 규모는 2021년 3억2000만원에서 2024년 6월 기준 약 30억원으로 불어났다. 임금체불이 지속되면서 한때 50명이 넘었던 직원 수는 현재 10명으로 줄었다.
연구원 관계자는 “연구원이 지원하는 업종과 기업 자체가 영세하다 보니 R&D 등에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였다”며 “정부 예산을 따서 기업을 지원하는 게 연구원의 주 업무였는데 이를 중단시켜놓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란 것인가”라고 말했다.
연구원은 정부가 임금체불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구원 본원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가 약 51억원에 매각됐지만, 이를 임금 지급에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연구원 관계자는 “원장이 없으니 주요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면서 “건물 등 자산이 있어도 임금을 지급에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산업부 측은 “경매로 얻은 돈은 연구원에 대한 채무를 먼저 해결하는 데 사용했다”면서 “더 이상 아무런 수입이 없어 (임금체불에) 쓸 돈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원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부패신고센터에 사태와 관련한 내용을 제보하고, 감사원에도 국민감사청구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고, 소송 대응에 집중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