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7월 17일 오후 5시 조선비즈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전경. /뉴스1

공정거래위원회가 ‘투자’로 포장된 대기업집단의 편법 지원 구조를 정조준하고 나섰다. 겉으론 정상적 금융거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부실 계열사의 빚을 대신 떠안는 경우가 많다는 판단에서다. CJ그룹을 제재한 공정위는 앞으로 다른 대기업들도 일제히 점검하겠다는 방침이다.

18일 정부에 따르면 공정위는 최근 ‘채무보증 제한제도 우회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된 46개 대기업집단 소속 1900여개 계열사를 대상으로 계열사 간 거래 구조와 자금흐름 전반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총수익스와프(TRS), 특수목적법인(SPC), 자금보충약정 등 복잡한 금융기법을 이용해 사실상 계열사 보증 효과를 내는 거래가 주요 점검 대상이다. 이 중에서도 TRS는 금융회사가 계열사 대신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그 이익과 손실을 고스란히 계열사가 책임지는 구조다.

예컨대 신용도가 낮은 계열사(A)가 돈을 빌리기 어려울 경우, 신용도가 높은 모회사(B)가 금융회사와 TRS 계약을 맺는다. 금융회사는 A가 발행한 채권을 매입하고, 그 수익(이자 등)을 B에게 넘긴다. 대신 손실이 날 경우 그 책임도 B가 지도록 계약한다. 표면상으론 ‘투자’지만, 실제론 B가 A의 채무를 대신 떠안는 셈이다.

SPC는 위험을 외부로 분리하기 위한 법인, 자금보충약정은 SPC의 손실을 계열사가 메워주겠다는 약속으로, 이 역시 채무보증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공정위는 용역을 통해 TRS 등 거래의 계약 구조, 상대방, SPC 설립 여부, 공시 여부, 금액 및 거래 조건 등을 실태 조사하고 과거·현재의 우회 지원 사례까지 함께 발굴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자금보충약정처럼 SPC에 대한 지급 책임을 명시한 경우, 그 실질이 계열사 간 보증과 다를 바 없는지 면밀히 살핀다.

공정위는 지난 4월, 대기업집단 규제를 다룬 고시를 새로 제정해 “파생상품을 이용한 우회적 채무보증은 규제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특히 대기업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만든 파생상품에서, 손해는 계열사가 다 떠안고 금융회사는 명목상 투자만 하는 구조는 사실상 보증이라고 봤다.

적용 대상은 TRS, 신용연계증권(CLN), 파산 등에 따른 신용변동(CDS) 등이며 금융기관이 설립한 SPC를 중간에 끼워 넣는 방식도 동일하게 본다. 특히 TRS는 ‘수익을 나누는 계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열사 부채를 대신 책임지는 효과가 있다. 계약상 수익자는 금융회사지만, 손익은 결국 그룹 계열사가 책임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최장관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감시국장이 16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업집단 '씨제이' 소속 계열회사들의 부당지원행위 제재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공정위의 전수조사는 CJ그룹 사례가 도화선이 됐다. CJ는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TRS 계약을 체결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2023년 참여연대의 신고로 조사가 시작됐고, 공정위는 CJ의 거래 방식이 부당지원에 해당한다며 6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CJ는 신용도가 낮은 계열사 두 곳(CJ건설·시뮬라인)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우량 계열사인 CJ와 CGV가 금융사와 TRS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에 따라 두 계열사가 발행한 영구전환사채를 금융사가 인수하고, 손실이 나면 CJ와 CGV가 이를 대신 부담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금융사가 ‘투자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량 계열사가 손실 위험을 떠안는 구조로, 사실상 부실 계열사의 채무를 보증한 셈이다. 그 결과, 신용도가 낮은 두 계열사는 시중보다 낮은 금리로 총 650억원을 조달할 수 있었고, 대신 CJ와 CGV는 실질적인 신용위험을 감수하게 됐다.

공정위는 이처럼 ‘우량사가 부실사를 대신 지원하는 효과’가 있었음에도 외형상 금융 투자처럼 꾸며졌다는 점에서 계열사 간 부당 지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TRS를 파생상품을 통한 투자로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지급보증과 동일한 효과를 낳은 사례”라고 설명했다. 특히 CJ 내부에서도 손실 우려와 배임 가능성으로 한 차례 계약이 부결된 점, TRS 계약 기간에는 전환권 행사가 제한된 점 등도 위법 판단의 근거가 됐다.

공정위가 TRS 구조 자체를 문제 삼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공정위는 지난 2018년에도 효성그룹이 계열사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SPC와 TRS 거래를 활용했다고 보고 조사에 착수했고, 2022년 대법원은 해당 거래가 실질적으로 채무보증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공정위는 이번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TRS뿐 아니라 CLN, CDS 등 파생상품 전반에서 규제 사각지대를 찾고, 고시·법령 개정을 검토할 방침이다. 과거에는 계열사 지원 행위를 우회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방식이 이제는 모두 조사·제재 대상이 된다는 신호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라 추가 제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한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는 “예전에는 TRS나 SPC 같은 구조를 쓰면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누가 손해를 떠안았느냐’를 따져서 제재할 수 있다는 게 공정위의 시그널”이라며 “2·3세가 물려받은 회사에 이런 방식으로 그룹이 도와준 사례들이 앞으로 많이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