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현지시각)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담만에서 출발해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고속도로를 2시간쯤 달려 자푸라에 도착하니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중동 지역 최대 규모의 셰일가스전’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는 가스전에서 추출한 가스를 가공·정제하는 ‘자푸라 가스플랜트’와 이를 지원하는 ‘열병합 발전소’의 마감 공사와 시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플랜트 현장에서는 거대한 선풍기가 15개가 모여있는 모양의 ‘공랭식 응축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축구장 절반 크기의 공랭식 응축기 설비는 국산 중소기업 다산DTS가 제작해 중동에 공급한 제품이다. 물을 구하기 어려운 중동에서는 공기와 팬으로 증기를 식힌다고 했다.
이역만리 타지에 진출한 건 한국의 기자재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전력과 두산에너빌리티 직원들은 열병합 발전소의 시운전을 진행 중이었다. 한전은 사우디 아람코와 함께 열병합발전소 사업 개발과 운영을 맡고, 두산은 설계부터 기자재 공급·설치·시운전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일괄 수행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첫번째 열병합발전소가 운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번째 자푸라 열병합발전소 건설을 계획할 정도로 이 프로젝트에 정성을 들이는 중이다.
◇ 에너지 전환과 급증하는 전력 수요, 기회의 땅 중동
‘검은 황금’의 땅 중동이 에너지 전환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팀 코리아(Team Korea)’가 수출을 늘리고 있다. 최근 5년간 한전의 수주 사업(해외 기준) 중 중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8%(용량 기준)에 달한다. 현재 원전, 열병합, 풍력, 태양광, HVDC(초고압직류송전) 등 총 33개 해외 프로젝트 중 11개를 중동에서 운영 중이다.
한전은 올해 해외 사업 중점 추진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를 꼽고 있다. 중동에서 한국 에너지 기업들이 발을 넓히고 있는 이유는 석유 부자 중동 국가들의 ‘에너지 전환’과 ‘급증하는 전력 수요’가 있다.
UAE는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50%로 확대하고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오픈AI가 아부다비에 26㎢ 규모의 초대형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하며 전력 수요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데이터 센터 건립으로 원자력 발전소 5기만큼의 전력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2030년까지 화력 비중(현재 96%)을 줄이고 신재생 비중(현재 3.5%)을 5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모타나 알오다입 아쿠아파워 사업개발처장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야심찬 에너지 전환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며 “수십년간의 노하우를 가진 한국전력, 두산 같은 다양한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AFC 아시안컵(2027), 네옴 동계아시안 게임(2029), 엑스포(2030), 월드컵·리야드 하계아시안게임(2034) 등 초대형 국제행사도 여럿 예정돼 있다.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모르도르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사우디의 전력 설비 용량은 2025년 92.9GW에서 2030년 123.2GW로 확대될 전망이다.
권병수 루마나이리아 프로젝트 한국 법인장은 “현재 사우디에서는 신재생과 가스복합발전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루마 가스발전소 현장에서 만난 두산에너빌리티 직원도 “사우디 전국이 공사판이라고 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 해외 사업으로 수익 다변화 노리는 韓 기업들
한전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변화에 맞춰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한 상황이다. 초고압직류송전과 배터리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분야에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수익 다변화를 노리고 있다.
올해 중동에서 입찰이 진행되고 있거나, 진행될 것이라 예상되는 사업도 팀 코리아에게는 기회다. 올해 입찰 예정인 사업은 ▲UAE 아부다비 수전력청 배터리 ESS 사업(400㎽) ▲사우디아라비아 자푸라 2 열병합 사업(320㎽) ▲사우디 원자력공사 원전 2기 ▲사우디 라운드6 신재생에너지 사업(5GW) ▲사우디 그룹1 배터리 ESS사업(2.0GW) ▲UAE 알 누프 복합화력 발전소(3.3GW)▲바레인 시트라 민자담수발전(1200㎽)로 다양하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올해 한전이 아부다비 수전력청의 배터리ESS 사업과 자푸라 2단계 열병합 사업을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부다비 수전력청 배터리 ESS 사업을 수주할 경우 중동 첫 배터리 사업 진출이 된다. 향후 수주의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전이 자푸라 열병합 발전소 1단계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뒤, 2단계 사업 수주 가능성이 높아진 것처럼,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동 지역 내 에너지 프로젝트 발주 증가는 수익 다변화를 추구하는 한국 기업들의 니즈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한전은 원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전력을 판매한 탓에 누적부채가 200조원이 넘었고, 해외사업으로 부채를 줄여가야 하는 상황이다. 한 때 탈원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두산에너빌리티도 해외수주 확대를 통해 매출 증대와 수익성 개선을 도모 중이다.
중동의 에너지 프로젝트는 국내 중소기업에게도 기회를 제공한다. 한전이 수주한 하나의 프로젝트에는 국내건설사, 기자재 업체, 정비 운영사, 금융기관 등 최소 10곳에서 최대 90개 기업이 참여한다. 실제 바라카 원전의 경우, 총 사업비 186억 달러 중 78%가 국내에 유입됐다.
한전은 중동사업의 안정성이 매력적이라고 보고 있다. 중동 사업은 발주처가 무상으로 사업 부지나 용수를 제공하는 데다, 국내와 달리 부지가 넓고 왕정체제로 민원 제기가 거의 없는 편이다. 국영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리스크가 적고, 장기 전력 판매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플랜트 건설 후 경쟁적으로 전력을 판매해야 하는 영국 같은 국가와 대조적이다.
한전 관계자는 “중동의 주요 에너지 기업과 20년간 이상 전력판매 계약 체결을 할 경우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며 “또한 국내 건설사 시공, 금융기관의 재원 조달 등 팀코리아 동반 진출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후티 반군의 이스라엘 공습 등은 중동의 에너지 사업 발주를 늦추거나, 기자재 공급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김희중 사우디 자푸라 사업법인 건설소장은 “후티와 이스라엘 전쟁으로 유럽산 기자재가 기존 항로로 조달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거쳐 왔다”며 “2000kg가량의 기계를 2박3일에 걸쳐 육로로 수송하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광호 한국전력 중동지사 지사장은 “원전은 핵연료를 이용해야 해 국내외적으로 안정화돼야 가능한 사업”이라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원전 발주가 지연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그럼에도 중동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