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부처들이 매년 비밀리에 제출하던 ‘예산요구서’가 앞으로는 외부에 공개된다. 현재의 예산 편성 제도가 갖춰진 1949년 이후 처음 시작되는 일이다. 기획재정부는 예산요구서를 공개하는 기준을 담은 지침서를 마련 중이다. 그동안 정부가 예산요구서를 대외비로 처리하면서 ‘특정 예산을 밀어 넣는 통로가 된다’, ‘예산 편성의 투명성을 떨어뜨린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29일 기재부에 따르면 예산요구서는 각 중앙행정부처가 기재부에 5월 31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문서다. 각 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업들의 항목과 소요 비용을 담고, 기재부는 이를 바탕으로 예산 규모를 가감(加減)해 9월 2일까지 최종 정부 예산안을 짠다. 예산요구서는 정부 예산안의 ‘초안’인 셈이다.
◇ 기재부, ‘예산요구서 공개 지침’ 마련 중
각 부처가 기재부에 올리는 예산요구서는 그간 공식적으로 공개된 적 없었다. 원칙적으로 정부 비밀문서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현행 예산 편성 제도가 굳어진 1949년 이래 이 원칙은 일관되게 유지돼 왔다. 정부는 9월 초 완성되는 최종 정부 예산안만 공개할 뿐이다. 예산에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보니, 그 과정이 대외에 공개되면 의사결정에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굳건했던 예산실의 원칙을 깨트린 건 최근 대법원 판결이었다. 대법원 제1부(재판장 신숙희 대법관)는 지난 3월 27일 세금도둑잡아라 등 3개 시민단체가 기재부를 대상으로 낸 ‘정부 부처(보건복지부) 예산요구서’에 대한 정보공개 행정소송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려, “자료를 공개하라”는 1·2심 원심을 확정했다.
당초 서울고등법원은 “국민들이 납부한 세금은 예산의 가장 중요한 재원으로, 국민에게 이 사건 정보 공개를 통해 예산 편성 과정에서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권리를 충분히 보장할 필요성이 크다”며 “(예산요구서 공개 시) 오히려 정부 부처들의 무분별한 예산 요구를 방지하고, 책임 의식을 고취하는 등 예산 편성의 공정성·객관성·투명성을 제고하는 순기능이 더 크다”고 판시했다.
◇ “정보공개청구 시 정부 예산안 확정된 해의 요구서만 공개”
기재부는 우선 ‘이미 정부 예산안이 확정된 해의 예산요구서 공개는 가능하다’는 대원칙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즉 지난해 만들어진 2025년도 예산요구서까지는 공개 가능하지만, 올해 논의 중인 2026년도 예산요구서는 현시점에서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예산요구서에 포함된 정보는 전면 공개가 아닌, 정보공개청구에 따른 부분적 공개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예산 편성 실무를 담당하는 기재부 예산관리과는 현재 정보공개법에 따른 비공개 대상 정보를 중심으로 공개 기준을 마련 중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보공개청구가 들어오면 법에 따라 공개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지만, 국방·외교·안보 등 민감한 사항은 예외가 가능하다”며 “대법원 판례 취지를 고려해 전체를 비공개하는 건 어렵다는 방향 속에서 부처별 판단 기준을 정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특정 기종의 탱크를 몇 대 구입하는 예산처럼, 무기 체계나 전략 자산의 수량과 성격이 드러나는 항목은 안보상 비공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이에 따라 외교부·국방부 등 특정 부처의 요구서나 일반 부처의 요구서 역시 민감한 내용의 일부 항목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
예산요구서 공개 기준과 절차를 명시한 지침은 내부 검토를 거쳐 오는 6월 말까지 확정될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부처별 대응을 표준화하고, 이후 청구 건마다 이 기준에 따라 적절한 비공개 범위를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또 기재부·복지부는 ‘2022년도 복지부 예산요구서’를 공개하기 위한 협의도 함께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