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가 ‘자국 수산물 경쟁력 회복’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한국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이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 등을 이유로 한국산 수산물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수산업 현장의 실태를 점검하고, 외국인 노동자 채용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법 개정에 착수했다.
19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미국 수산물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명령에는 “불공정한 대외 무역 관행으로 인해 약화된 미국산 수산물의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달 3일, 한국 태평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에 대해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강제노동을 이유로 한국산 제품이 수입 금지된 건 사상 최초였다. 미국은 최근 한국 농어촌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 실태 조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 수산업의 노동 환경을 문제 삼아, 수산물 전반에 대한 규제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이에 대응해 다방면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법무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등과 함께 지난달 29일 ‘대미 수산식품 관세 및 통상 현안 범부처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회의를 개최했다. 현재 노동부와 법무부는 수산 현장 실태 점검을 준비하고 있다. 실태 점검은 주로 전라남도 지역의 김, 굴 생산지나 외국인 근로자가 밀집한 양식장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법무부와 국회도 외국인 노동자 채용의 제도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임미애 의원은 최근 ‘출입국관리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며, “현행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는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지침에만 의존해 외국인 계절 근로자의 인신매매 피해 등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에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 제도의 명확한 법적 근거 마련 ▲계절 근로 정책 협의체 설치 운영 ▲전문 기관 지정 및 예산 지원 ▲브로커 개입 차단을 위한 처벌 조항 신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정부와 국회가 이처럼 나선 배경에는, 한국의 외국인 계절 근로자 제도가 구조적으로 브로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다. 외국인 계절 근로자 제도는 파종기‧수확기 등 계절성이 있어 단기간·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업 분야에서 합법적으로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는 제도다. ▲대한민국 지자체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외국 지자체 주민 ▲결혼 이민자의 가족, 사촌 이내 친척 ▲계절근로 참여 요건을 갖춘 국내 체류 외국인 등이 대상이다.
현재는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한두명이 여러 국가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모집하는데, 언어 장벽과 과중한 업무로 브로커를 통해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브로커는 외국인 근로자의 항공료를 지급해주는 대신,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신분증을 압류하고 협박하는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사례도 알려지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매년 보직이 바뀌는 지자체 공무원 한 명이 수십 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직접 모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며, “전문 기관이 MOU 체결과 채용을 맡고, 지자체는 관리만 맡는 구조로 바뀌면 효율성과 투명성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오는 6월 발표 예정인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 보고서(Trafficking in Persons Report·일명 팁리포트)’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은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근거로 수입 규제 조치를 취하는 경향이 있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경우 한국 수산물 수출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고기복 모두를위한이주인권문화센터 대표는 “미국은 매년 ‘팁 리포트’를 바탕으로 미국 세관국경보호청(CBP)이 수출 규제를 시행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한 품목의 공급망에서 문제가 있었더라도, 기업의 전 품목을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이 공급망 전반을 살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고무장갑 제조업체인 ‘탑글러브(Top Glove)’는 2020년, 외국인 노동자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1년 2개월간 수입 금지 조치를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미국 고무장갑 시장의 70%를 차지하던 말레이시아 기업들의 점유율은 2023년 기준 47%로 급락했다.
이 때문에 농수산식품이 전체 대미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농어민들의 매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어 미국의 조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수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미국(4억8000만달러)은 일본(6억6000만달러),중국(5억3000만달러) 에 이어 한국 수산물의 세 번째로 큰 수출국이었다.
특히 미국이 김 양식장을 문제 삼을 경우, 올해 ’10억달러 수출’을 노리는 김 수출길이 막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기준 대미 수출액 상위 품목은 ▲김(2억1000만달러) ▲이빨고기(6000만달러) ▲굴(2500만달러) ▲넙치(1900만달러) ▲오징어(1800만달러) 순으로, 김 수출액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해수부는 미국의 관세 부과 및 수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비관세장벽 대응 전담 센터를 확대 운영하고, 수출 이력 정보 관리 시스템도 구축하겠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