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무부가 조만간 환율보고서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중국의 환율조작국 지정 여부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만약 지정이 현실화될 경우 미·중 갈등이 한층 격화되면서 단기적으로 위안화 약세가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위안화와 동조성이 높은 원화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25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그간 미국 재무부는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눠 환율보고서를 발표하고 의회에 제출했다. 통상 4월과 10월에 나오는 게 관례였다. 올해 발표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늦어도 다음 달에는 공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 중국, 1992년·2019년 환율조작국 지정… 위안화 변동성 확대

환율조작국 지정은 1988년에 제정된 종합무역법을 근거로 한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재무장관은 현저한 대미 무역흑자 및 상당한 경상흑자를 기록한 국가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

미국은 환율조작국에 환율과 무역흑자 시정을 요구할 수 있으며, 1년 내 개선되지 않으면 제재에 나설 수 있다. 여기에는 미 기업의 투자 제한, 해당국 국가의 미국 연방정부 조달계약 체결 제한, 국제통화기금(IMF)에 추가적인 감시 요청 등이 포함된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 센터에서 직원이 위안화와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이러한 기준이 자의적이고 개념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미국은 2015년 교역촉진법을 만들어 이 기준을 구체화했다. 교역촉진법에 따르면 ▲상품서비스 무역흑자 150억달러 이상 ▲국내총생산의 3% 이상 경상흑자 ▲GDP의 2% 이상 및 8개월 이상 달러 외환당국 순매수 등 3개 요건이 충족되면 심층분석대상으로 지정된다. 통상 심층분석대상국은 환율조작국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은 1992년 처음으로 환율조작국에 지정됐다. 1990년 이후 대규모의 대미 경상흑자를 기록하면서도 위안화가 저평가돼있고, 환율제도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중국은 미국과 환율 제도 개혁을 위한 합동 위원회를 만드는 등 개선 노력을 기울였고, 이에 2년 뒤 미국은 중국을 환율조작국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미국 재무부는 25년 만인 지난 2019년 8월 5일, 중국을 또 다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미국은 중국이 교역촉진법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음에도 종합무역법을 근거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 당시 재무부는 “중국이 자국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를 했다”면서 “중국이 외환시장에서 지속적이고 큰 규모의 개입을 통해 통화가치 절하를 용이하게 해온 오랜 역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결정으로 시장에서 위안화 환율 변동성이 심해졌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달러·위안 환율은 8월 5일 7.0352위안에서 꾸준히 상승해 같은 달 26일 7.1528위안까지 절하됐다. 이는 2008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중국인민은행은 유동성 흡수를 위해 300억 위안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지만, 위안화 약세를 막지는 못했다. 달러·위안 활율은 미·중 1단계 무역합의 서명식 체결 소식이 알려진 이듬해 1월에야 안정화됐다.

◇ 또 조작국 지정되면 韓도 영향… 원화 변동성 커질듯

시장에서는 이번에 미국이 중국을 또 다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전례가 있는 데다, 최근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도 달러 강세 해소 방안으로 ‘마러라고 합의’ 같은 다자간 환율조정 협의를 제안한 바 있어서다. 마러라고 합의는 교역국이 보유한 10년 이하 단기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로 교체하도록 유도해 달러 가치를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래픽=정서희

만약 중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된다면 위안화와 동조성이 높은 원화도 단기적으로는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2019년 지정 당시에도 원·달러 환율은 위안화 흐름을 따라 심리적 저지선인 1200원 선을 돌파했었다. 달러·위안 환율이 7.18위안까지 치솟았던 9월 3일에는 1215.60원으로 급등한 바 있다.

환율 급등은 금융불안을 확대시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7일 열린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높은 환율 수준과 가계부채 불안 등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일각에서는 원 달러 환율이 1480원대에서 1410원대로 하락한 점을 근거로 금리 인하 가능성을 점쳤지만, 한은은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환율이 더 오른다면 금리 인하 시점은 더 늦춰질 수 있다.

미·중 협상이 신속히 타결되지 않고 장기화될 경우 실물경제에도 부정적인 여파가 예상된다. 이는 중국의 경기 둔화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의 대중 수출도 감소할 수 있어서다. 김진욱 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한 관세율을 낮추더라도 미·중 협상에 큰 전전이 없다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0.5%포인트(p)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승헌 숭실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전 한은 부총재)는 “한국은 지난 20여년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해 온 만큼, 미·중간 힘겨루기가 격화되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국가 중 하나”라면서 “중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한국 경제도 직·간접적으로 부담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