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fitch)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상호관세 정책과 국내 정치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 경기 하방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피치는 이런 점을 감안해 한국은행이 연내 기준금리를 1%포인트(p) 더 인하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시장의 예상보다도 공격적인 완화 조치다.
◇ “한국 경제, 상호관세·내수 부진 등 역풍 직면"
피치의 아시아태평양 국가신용등급 담당 제레미 주크 이사는 25일 서울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피치 온 코리아 2025’ 컨퍼런스에서 “한국 경제가 미국발 관세와 이에 따른 수출 정체, 내수 부진 등 여러 역풍에 직면할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주크 이사는 “미국의 상호관세가 시행될 경우 베트남, 한국 등 아태지역의 수출지향적 국가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이달 (피치가) 성장률 전망치를 전방위적으로 하향조정했는데, 상호관세가 도입된다면 더 (하향)조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피치는 지난 주 공개한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1.3%에서 1.0%로 하향조정한 바 있다. 주크 이사의 발언은 한국의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주크 이사는 컨퍼런스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정전망에서는 양국 간 협상을 거쳐 미국의 대한(對韓) 관세가 15%로 조정될 것으로 가정했다”면서 만약 세율이 이보다 높아진다면 하방 리스크가 커질 것으로 봤다.
주크 이사는 우리나라의 내수 부진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1분기 GDP 성장률은 우리의 예상보다 낮았다”고 평가하면서 “올해 초 성장세가 당초 예상보다 낮았던 점이 하방 리스크를 키울 것”이라고 했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GDP는 전기 대비 0.2% 하락하면서 3분기 만에 하락 전환됐다.
다만 피치는 한미간 협상이 진전을 보이고, 국내 정치 불확실성도 완화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주크 이사는 “간밤 진행된 한미 간 ‘2+2 통상협의’를 계기로 양국이 어느정도 합의점을 도출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도 완화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피치도 이런 점을 감안해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AA-’, 전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피치는 2012년 한국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조정한 뒤 13년째 같은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주크 이사는 “한국 경제는 관세와 정치 변동성에도 풍부한 재정을 토대로 복원력을 보이고 있다”면서 “단기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 “기준금리 100bp 내릴 것… 대선 후 2차 추경 가능성도"
주크 이사는 향후 한국 정부가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면서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가 현행 연 2.75%에서 100bp(1bp=0.01%p) 더 인하될 것으로 전망했다. 25bp씩 인하된다고 가정하면 한은이 기준금리를 4회 더 내릴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한은과 시장의 예상보다도 더 완화적이다. 앞서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2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올해 시장이 2~3차례(50~75bp) 금리 인하를 예상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한은의 전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 바 있다. 상호관세가 발효 이후 열린 이달 금통위에서 추가 인하 가능성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시장에서는 최종 금리가 2.0% 밑으로 내려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크 이사는 “한은은 가계부채 증가 등 금융불안 가능성보다 성장 둔화를 더 고려할 것”이라면 “물가 상승률은 통제되고 있지만 성장률은 경기 하방 위험으로 인해 예상보다 더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는 한은이 금리를 추가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정부 역시 확장 재정정책을 펼치면서 경기 부양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주크 이사는 “상당한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이 편성될 것”이라면서 “ 6월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2차 추경도 추진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추경 편성으로 인한 국가부채 증가 우려에 대해서는 “한국의 국가부채가 향후 몇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추경이 생각보다 큰 규모로 수립된다고 하더라도 국가등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면서 “한국이 과감한 재정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