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3일(현지시각) 고물가 시기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분리원칙’(separation principle)과 ‘신중한 규제’(prudent regulation)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용 총재는 이날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춘계 연차총회에서 진행된 ‘인플레이션 시기 통화 정책과 금융 안정’ 세션에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통화 정책 운영에 필요한 구조적 변화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총재는 이날 세션에서 2022년 한국이 겪은 고물가 시기 중앙은행으로서 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어려운 상황을 소개했다. 당시 세계적인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미국은 3차례에 걸친 ‘자이언트 스텝’(75bp 인상)을 시행했고, 한국 역시 두 차례의 50bp를 인상하는 ‘빅스텝’을 밟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총재는 이어 “이처럼 급격한 금리 인상은 금융 시장의 안정성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특히 한국은 부동산 및 가계 부문의 부채로 인해 금리 인상 기조 속에서도 유동성을 공급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두 번째 문제는 미국과의 금리 격차 확대로 인해 환율이 급격한 점”이라며 “환율 하락으로 금융기관들이 원화 자금 시장 접금하면서 국내 금리가 추가로 상승했다. 긴축정책을 진행하는 와중에 금융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긴축됐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우리는 계속해서 통화 정책을 긴축하면서 인플레이션과 맞서야 했다”며 “한국의 인플레이션은 글로벌 시장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어서 금리 인상 기조를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이어 “동시에 특정 부문에 유동성을 공급해야 했고, 또 환율을 막기 위해 외환 시장 개입도 필요했다”며 “상충되는 목표가 많았다. 분리 원칙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분리 원칙이 효과적이진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금리를 급격하게 올려서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라고, 다른 사람은 ‘긴축 정책을 진행하면서 특정부문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면서 “솔직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인플레이션 시기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과제에 대해선 “특정 부문에 유동성을 공급하려면 일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쉽지 않은 문제다. 느슨한 규제로 레버리지가 많았던 상황이긴 한데,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이 규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한적 방식으로 활용하더라도 ‘준재정 활동’을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며 “필요할 때는 다양한 도구를 조합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물가 대응에 전력하기 위해 독립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22년 금융 위기 당시 인플레이션 대응을 최우선 정책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4년 임기의 중앙은행 총재였기 때문”이라며 “규제당국이나 재무 장관의 임기는 통상 2년 이하로 더 짧다”고 했다.
이 총재는 이어 현재 중앙은행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개발 중인 정책 도구로 ▲유동성 공급 도구 ▲상시 대출제도 ▲외환시장 개입 ▲건전성 규제 강화 등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근 금융 시장의 어려움을 되돌아보면,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높은 레버리지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면서 “외환 시장의 특성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통화 정책 운영에 필요한 구조적 변화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