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4월 23일 오전 11시 26분 조선비즈 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율준수프로그램(CP) 평가제도를 전면 개편한다. 당초 개정안이 “기업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산업계 반발이 이어지자, 점수 기준 상향안을 철회하고 평가 방식과 인센티브 체계 중심으로 조정했다. 평가제 개편의 골자는 유지하면서도 현장 혼선을 줄이겠다는 절충안으로 풀이된다.

공정위는 23일 ‘공정거래 자율준수제도(CP) 운영·평가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확정하고, 이날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안은 지난 3월 행정예고한 초안에서 주요 내용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CP는 기업이 스스로 공정거래 법규를 준수하기 위해 내부에 교육·감독 체계를 마련하고 운영하는 자율준수 프로그램이다. 공정위는 CP 평가에서 AA 이상 등급을 받은 기업에 대해 법 위반 시 과징금을 최대 20% 감경해 준다.

◇ “점수 올리겠다”던 공정위, 결국 철회… 기존 등급 기준 유지

당초 공정위는 CP 우수등급 기준 점수를 A등급 기준 70점에서 80점으로 상향하고, AA는 80점에서 85점으로 조정하는 개정안을 예고했다. 하지만 이 같은 안은 업계 반발을 불렀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기업들은 통상 연초에 등급별 기준 점수에 따라 연간 계획을 수립, 운영해 이듬해 등급 평가를 신청한다”며 “공정위는 올해 평가 신청을 열흘 앞둔 지난 2월에서야 기준점수 상향 조정안 등을 발표해 기업 혼란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공정위는 등급 기준 점수는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AAA는 90점 이상, AA는 80점 이상 90점 미만, A는 70점 이상 80점 미만으로 구성된 기존 점수 체계를 유지한 채, 평가 등급을 기존 6등급(AAA~D)에서 3등급(AAA, AA, A) 체계로 단순화했다.

이번 개정으로 기존에 있던 B, C, D등급은 폐지됐다. 공정위는 이 세 등급을 ‘CP 우수기업 지정제’로 지정해 제도 신뢰성과 실효성을 동시에 높이겠다는 취지다.

A등급에 부여되던 직권조사 면제 등 인센티브는 이번 개정에서 폐지됐지만, 제도 변경 유예기간을 고려해 2026년까지는 한시적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CP 운영고시 개정안 신․구조문 대비표.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 자동 하향→감점 전환… CP 위반기업도 부담 줄어

이번 개정에서 기업이 가장 반겼던 부분은 ‘등급 자동 하향’ 제도의 폐지다. 기존에는 CP 운영 기업이 과징금이나 고발 등 제재를 받으면 등급이 자동으로 1~2단계 하향됐다. 개정안은 이 방식을 폐지하고 감점제로 바꿨다. 법 위반 시 최대 5점을 감점하고, 평가 심의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등급 하향이나 지정 제외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등급을 신청했을 뿐인데 이후 제재로 등급이 무효화되면 제도 참여 유인이 없다”는 업계 반론을 일부 수용한 조치다. 공정위 관계자는 “CP 등급평가를 최초로 신청하는 기업에는 감점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평가를 신청한 뒤 공정위의 조사가 개시되면 평가가 보류되는 ‘등급 보류제’도 폐지됐다. 그간은 조사 개시나 심사보고서 상정만으로 평가를 중단할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심사보고서가 올라와도 평가 자체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이는 무혐의로 결론 난 기업까지도 평가가 지연되는 불합리함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다.

개정안에는 협약이행평가(하도급·가맹·유통·대리점)에서 ‘우수’ 이상을 받은 기업에 대해 CP 평가 시 최대 1.5점의 가점을 주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존 ‘타사 CP 운영 지원’ 가점(최대 7점)과 합산하면 최대 8.5점까지 받을 수 있다. 일부 업계 관계자는 “비(非)대상 업종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형평성 논란을 제기했다.

일각에선 평가지표 전면 손질 없이 땜질식 개정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준길 법무법인 지평 고문은 “등급 평가지표와 기준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평가 체계 자체도 2006년 이후 바뀌지 않은 만큼 조속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며 “B등급 이하 기업에 대해선 평가 자체가 이뤄지지 않아 CP 운영 수준에 대한 피드백 기회가 없다는 점도 미흡한 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업계에서는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CP 제도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CP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도입됐고,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실이 직접 CP를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포함한 전례도 있다”며 “민주당이 집권하면 CP 강화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