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 산불 피해로 올해 사과 수확량이 급감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물가당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23년 이상 기후에 따른 작황 악화로 2024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애플레이션’(사과 가격 급등)이 재발할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다. 산불 피해 현장 토양 정화부터 묘목 재이식과 수확까지 장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사과 생산량이 회복되기까지 겪을 ‘사과고개’를 넘기 위해선 수입 논의를 가속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0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경북도 등에 따르면 산불이 발생한 경북 5개 시·군에선 3701헥타르(㏊, 1㏊=1만㎡)의 과수원이 화재 피해를 입었다. 지역별로는 의성이 1835㏊로 가장 많고 안동 1095㏊, 청송 568㏊, 영덕 105㏊, 영양 98㏊ 순이다. 이들 지역은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 해당 지역에서 산불 피해를 입은 과수원 면적은 전국 사과 재배 면적(약 3만3000㏊)의 10%를 상회한다.
화마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어도 산불로 인한 그을음과 연기·열상 피해까지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 커진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의 피해 규모는 ‘달관조사’라고 해서 눈으로 대략적으로 확인한 규모”라며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작황 영향을 구체적으로 추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15일까지 예정된 피해 조사가 완료돼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 입장이다. 이와 관련,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9일 충남 예산 사과 농장 방문 현장에서 “지금까지 집계된 피해 면적은 재해보험을 청구한 과수 농가의 총 면적으로, 실제 피해 면적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정확한 피해 규모는 경북지역 사과나무의 개화 여부까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도매시장에서 사과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사과 농가에서 보관 중이던 지난해 수확한 사과 2000톤가량이 화재로 소실되는 등 향후 공급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후지(부사) 사과 상품(上品) 10개의 소매가격은 2만8186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41%나 뛰었다.
물가당국에선 과실물가가 전년 동월 대비 40%까지 치솟았던 작년 상반기 물가 상황이 재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사과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80% 이상 뛰었다.
작년 가을 사과 작황이 회복하면서 사과 가격이 안정을 찾았지만, 올해 가을 수확기 사과 가격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확한 피해 규모와 생산 및 출하량을 봐야겠지만, 예년보다 사과 가격이 오르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보고 있다”면서 “추석을 계기로 사과를 확보하려는 도매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소비자가격도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농식품부를 비롯해 물가당국에선 대책을 모색 중이다. 특히 2023년 수확량 감소는 이상 기후 현상으로 개화기 저온 피해가 발생해 작황이 감소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면, 올해는 작목이 소실돼 생산량을 회복하기 까지 장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어깨가 더 무겁다.
과수원에서 심은 사과 묘목이 정상적으로 생산을 하기까진 최소 4년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센터의 이동혁 소장은 “사과 묘목을 심은 후 정상적인 생산을 하기까지 과거에는 7년이 걸렸지만, 최근에는 작목 개량으로 그 기간이 4년까지 줄었다”면서 “묘목을 심은 후 3년차부터 생산량이 절반 수준을 회복하고, 4년차부터는 거의 정상 수준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장기간 사과 공급 부족이 예상됨에 따라 물가당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지난 2024년 사과 공급 부족 시기 정부는 망고와 바나나 등 대체 과일 수입 확대로 사과 수요를 돌리려고 했지만, 사과에 대한 수요를 돌리진 못했다. 물가당국 관계자는 “대체 과일 수입을 확대해도 사과에 대한 수요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며 “괜히 ‘국민과일’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물가당국 내부에선 “사과 물가를 잡으려면 사과를 수입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다만 농식품부에선 수입 검역 문제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외국산 과일이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선 국제 협약과 국내법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제식물보호협약(IPPC)과 세계무역기구 동식물 위생·검역조치 협정(WTO SPS)은 과학적 증거에 따라 검역절차를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법으로는 ‘식물방역법’에 수입위험평가와 관리 방안이 명시돼 있다.
해당 절차는 수출희망국의 요청 접수 → 수입위험분석 절차 착수 → 예비위험평가 → 개별 병해충 위험평가 → 위험관리방안 작성 → 수입허용기준 초안 작성 → 수입허용기준 입안예고 → 수입허용기준 고시 및 발효 등 8단계를 밟아야 한다.
2024년 사과 가격 폭등 시기 ‘사과 수입 검역 절차’가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특별한 진전은 없는 상태다. 1993년 사과 수입 논의를 시작한 미국은 3단계에 머무르고 있고, 일본은 2011년 5단계에 진입한 이후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나마 지난해 3단계 예비 위험평가 단계였던 독일이 올해 4단계 ‘개별 병해충 위험평가’ 단계까지 진입한 상태다. 과일 수입 검역 절차 중 7~8단계는 국내 행정적 절차로, 6단계까지만 종료하면 수입 시행 단계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수요에 맞춰 검역 절차를 가속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농식품부는 ‘과학적 검증이 우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과일 수입 검역과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과학적 증거에 기반하여 수입위험분석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에선 수입을 촉진하기보다 사과 농가 생산성 제고를 지원해 국내 사과 생산량을 확대하는 걸 우선적으로 검토 중이다. 특히 이번 화재로 소실된 사과 농가의 재건을 지원하면서 ‘다축형’ 재배와 열상팬 및 미세살수장치 등 스마트 장비를 농가에 보급해 이상 기후를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다음 주 초 발표할 추경안에 이러한 농가 재건 지원 예산을 전향적으로 반영할 계획이다. 송미령 장관은 “이번 계기에 재난 대응을 위한 스마트 장비를 투입해 미래형 과원으로 바꿔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추경안에) 스마트 과수원 지원 예산을 과감하게 반영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