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호관세 부과와 국내 정국 불안으로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넘어섰다. 금융위기 시기였던 2009년 3월 이후 16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를 계기로 글로벌 통상전쟁이 격화되거나 탄핵 선고 이후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환율이 1500원대까지 진입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 원·달러 환율, 1470원 돌파… 2009년 3월 이후 최고
3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원·달러 환율 주간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는 1472.9원을 기록하면서 연중 최고점을 기록했다. 금융위기 시기인 2009년 3월 13일(1483.5원, 종가 기준) 이후 가장 높았다. 이후 달러 강세가 다소 누그러지면서 지난 2일 1466.6원으로 내려왔지만, 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25%)을 포함한 교역 상대국에 고강도 관세를 부과하자 장중 1470원을 넘기면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를 감안하더라도 원화가치는 주요국에 비해 크게 하락하고 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한은이 집계하는 42개국 중 지난 3월 한 달간 달러 대비 자국 통화가치가 오른 곳은 32개국이다. 유럽은 4.1%, 일본은 0.2% 올랐고, 전쟁 중인 러시아도 3.2% 절상됐다. 미국이 관세 부과를 예고한 캐나다(0.8%), 멕시코(0.5%) 통화가치도 올랐다.
반면 한국은 0.6% 떨어지면서 튀르키예(-3.8%), 이스라엘(-3.2%), 대만(-0.9%), 카자흐스탄(-0.9%), 아르헨티나(-0.8%), 인도네시아(-0.7%) 다음으로 절하율이 높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최근 정국 불안이 고조된 튀르키예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와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 다음으로 한국의 원화가치 하락 폭이 컸다.
원화 약세가 두드러진 것은 미국의 고강도 관세정책으로 수출 중심 국가인 한국의 타격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간 중국과 캐나다,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했고,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등 일부 품목에 대해서도 각각 25% 관세를 부과했다. 3일에는 우리나라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에 대해서도 25%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예고했다. 이에 중국과 유럽연합(EU) 등 국가들이 맞대응을 예고하면서 글로벌 통상 전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정국 불안도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초 시장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선고가 지난달 중순에 발표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오는 4일에 발표하기로 하면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원화 강세 재료인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집행 시기도 1분기를 넘어서게 됐다.
◇ 韓 정치 불확실성· 글로벌 관세전쟁 심화 시 1500원 넘길 수도
일각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계 금융사 캐피털 이코노믹스(CE)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위기에 따른 정부 지출 둔화를 이유로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1.0%에서 0.9%로 낮춰잡았다. 원·달러 환율은 올해 말 1500원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환율이 1500원대를 기록한다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대내외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2분기 중 원·달러 환율 상단이 일시적으로 1500원 내외로 높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전 연구원은 미국의 고용 둔화와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금리 인하 가능성이 높아지면 연말 환율 수준은 1400원대로 내려갈 것으로 예상했다.
위재현 NH선물 이코노미스트는 연간 환율 상단을 종전 1470원에서 1500원으로 수정했다. 위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정치 불확실성은 탄핵 결과에 따라 4월 초 해소되겠으나, 달러 수급 부담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따라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환율의 추세적인 하향은 단기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 전망했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정국 불안과 관세 우려가 환율에 이미 반영돼 있다”면서 “헌재의 결정 이후 정치 불확실성이 더 커지지 않는 한 작년 말 고점이었던 1486원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1486원은 작년 12월 27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기록한 환율 최고치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 성격상 초반에는 미국이 관세를 세게 부과하더라도 협상을 통해 관세를 낮춰줄 것으로 보인다”면서 환율 상단이 1480원선일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정치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예상 외로 환율이 1~2주 만에 1430원 언저리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