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유럽에서 탄소국경세를 부과할 예정인 가운데, 정부가 ‘투트랙’ 방식으로 저탄소 철강 표준을 마련하기 위해 나선다. 정부는 국제적으로 저탄소 철강 표준을 마련하는 데 적극 참여해 우리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현실적인 저탄소 철강 표준을 수립할 계획이다.
3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에 따르면, 전 세계 4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 협의체인 ‘기후클럽’은 탄소 배출 절감과 무역을 위한 국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저탄소 철강 표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는 수소 1kg을 생산하는 데 나오는 탄소 배출량에 따라 ‘청정 수소 인증 등급’을 나누는 방식처럼, 철강을 생산하는 데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에 따라 ‘저탄소 철강’ 등급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기후클럽과 협력해 국제적인 저탄소 표준을 마련하는데 참여하고, 국내 기준의 저탄소 표준도 마련할 방침이다. 국내 철강 산업의 특성상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해 현실적인 저탄소 철강 표준을 제정할 계획이다. 또한, 이러한 국내 표준이 국제 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 관계자는 “전 세계에서 저탄소 철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제적인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며 “투트랙으로 저탄소 철강 표준을 마련하고, 탄소가 아예 나오지 않는 수소환원제철을 만들기 전까지 저탄소 철강과 관련해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 “트럼프 관세에 EU 탄소국경세까지”… 저탄소 관심 갖는 철강 업계
정부가 저탄소 철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철강 산업이 탄소 배출이 많은 업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SG 네트워크에 따르면, 한국의 철강 산업은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 방식을 살펴보면, 고로 방식은 전체 생산량의 67%를 차지하는데, 철강 1톤을 생산할 때 이산화탄소 2.3톤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나머지 33%는 전기로 방식이지만, 화석연료 기반 전기를 통해 생산돼 탄소배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철강 생산 중 이산화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저감하거나, 전혀 배출하지 않는 ‘수소 환원 제철’ 등 차세대 기술이 있지만 개발 난이도가 높다. 현재 예비타당성 조사를 진행중인 수소 환원 제철 기술이 국내에서 상용화되려면 2035년은 돼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철강업계는 전기로에 철스크랩(고철)을 넣어 탄소 배출량을 낮추거나, 고로에 수소를 포함한 가스를 주입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탄소 절감 성과가 더딘 가운데 수백억 원의 탄소 배출 청구서는 눈 앞까지 왔다.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시행한다. 탄소 비용이 반영되지 않은 수입품에 대해 EU 생산 제품과 동일한 수준의 탄소 비용만큼 CBAM 인증서를 구매하게 하는 제도다. 김종갑 전 한국전력 사장은 “우리에게는 트럼프 관세보다 탄소국경조정제도(탄소국경세)가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CBAM 도입 이후 국내 철강 부문이 감당해야 할 비용은 2026년 851억원에서 2034년 55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상의는 “철강 제품 수출을 통한 생산 유발액이 약 101조원, 부가가치 유발액이 약 22조원”이라며 “철강업계 비용 부담이 가중돼 생산활동이 위축될 경우, 서비스업 전반과 부가가치 창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요국의 보호무역주의 정책도 국내 철강업계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2일부터 전 세계에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에 EU는 다음 달부터 철강 수입량을 15%까지 줄이기로 했고, 인도도 12% 관세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문제는 보호무역주의 장벽을 치고 있는 나라들이 우리나라의 주요 철강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철강 수출 1위는 EU(381만톤)가 차지했고, 일본(367만톤), 인도(305만톤), 미국(276만톤) 등이 뒤를 이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보호무역주의가 심화하는 가운데, 가격 물량 경쟁을 하기보다는 저탄소·고부가 철강재 등 새로운 시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데 보고 있다”며 “이를 위해 정부의 정책이나 지원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도 지난 12일 진행한 간담회에서 업계에 “높은 불확실성을 상수로 보고 고부가제품 중심 투자 및 수출 전략을 전향적으로 검토해달라”며 “정부도 이러한 방향에 초점을 맞춰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 1월 출범한 ‘민관합동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TF’를 통해 중장기 발전 방안을 논의하면서, 저탄소 철강재 시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연구개발(R&D), 인력, 철스크랩 등 새로운 시장에 적합한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연구 용역을 통해 저탄소 철강 표준이나 수요 확대에 대한 방안을 도출하고, 철강산업의 미래 청사진을 담은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도 올해 안으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