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5일(현지시각) UAE 아부다비 국립전시센터에서 ‘제13차 WTO 각료회의’ 계기로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을 비롯한 한국(공동의장국), 칠레(공동의장국), 에콰도르, 중국,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과테말라, 말레이시아, 일본, 짐바브웨 등 투자원활화 협상 참여국 통상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투자원활화 협상참여국 공동각료선언을 발표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세계무역기구(WTO)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는 가운데 WTO 회원국 통상장관이 한 자리에 모여 체제 개혁과 주요 현안을 논의했지만 명확한 성과를 도출하는 데에 실패했다. 의제에 대한 결론을 만장일치(컨센서스) 방식으로 내리는 WTO 체제의 한계성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6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월 28일(이하 현지시각)부터 3월 2일까지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WTO 제13차 각료회의(MC13)는 전자적 전송(전자상거래)에 대한 관세 유예(모라토리엄)를 2년 연장하기로 합의하고 종료했다. 다른 핵심 현안인 농업 및 수산업 보조금에 대한 합의는 성사되지 않았다.

체제 개혁을 핵심 의제로 열린 이번 WTO 각료회의는 당초 2월 29일 종료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각료회의 선언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회원국간 입장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이틀 뒤인 3월 2일까지 회의가 연장됐다.

최종 채택된 ‘아부다비 각료선언’에는 ▲분쟁해결제도 개혁 ▲위생 및 식물위생 조치에 대한 협정(SPS)·무역에 관한 기술적 장벽 협정(TBT) 이행에 대한 개발도상국(개도국) 특혜 ▲최빈개도국 졸업국의 원활한 전환 지원 ▲전자상거래 작업 계획(무관세 관행 연장 포함) ▲소규모 경제 작업 계획 ▲TRIPs 비위반·상황 제소 유예 연장 등 총 6개 의제별 각료결정이 채택됐다.

우선 분쟁 해결과 관련해선 2022년 제12차 각료회의 이후 비공식 논의에서 나온 내용을 토대로 올 연말까지 분쟁해결제도 정상화를 위한 논의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 1995년 출범한 WTO는 자유로운 국제 교역을 장려하면서 국가 간 분쟁 땐 WTO 내 분쟁해결기구(DSB)에서 해결토록 하고 있으나 자국 우선주의 심화 속 위원을 충원하지 못해 수년째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이번 각료회의에서 명확한 결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가 담긴 관측도 나왔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무국으로 추가 논의를 과제로 넘긴 셈이다.

개도국에 위생 및 식물위생 조치에 대한 협정(SPS) 및 무역기술장벽 협정(TBT) 이행 특혜 조치, 또 최빈 개도국 졸업국에 대한 특혜 연장에 합의했다. 개도국에 WTO 규정을 선진국 수준으로 엄격히 적용해 자국 성장을 저해하지는 않겠다는 취지다.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관행은 제14차 각료회의(혹은 2026년 3월 31일 중 빠른 일자)까지 현행 체제를 연장한 후 종료(expire)하기로 합의했다. 14차 각료회의에서 논의가 진전돼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모라토리엄이 바로 종료되지 않고 추가 연장될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로선 ‘종료 시한’이 매겨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유예를 넘어 영구적 폐지를 희망했던 우리로선 아쉬운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2월 24일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을 만나 분쟁해결제도 정상화를 위한 개혁 논의 진전,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 협정의 WTO 체제 편입, 전자적 전송물 무관세 관행 연장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으로선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연장 조치가 종료될 경우, K팝을 비롯해 영화·드라마 등 디지털 콘텐츠 수출이 피해를 입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해영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수석연구원은 “모라토리엄 폐지 시 우리 디지털 콘텐츠가 해외시장에서 관세장벽에 노출되고, 각종 차별적 조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전자적 전송에 관세를 어떻게 부과할 것인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수입 콘텐츠 서비스에 더 높은 비용을 내야 하는 중소·벤처기업 및 소비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국제상공회의소(ICC)의 존 덴턴 사무총장도 “전자상거래를 보고 싶고 디지털 경제의 번영을 보고 싶다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구성 요소”라며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무관세 관행이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각료회의에선 인도 등이 격렬하게 반대해 ‘연장 합의 무산’ 위기까지 내몰렸으나 극적으로 ‘2년 유예’로 타결됐다.

또 다른 핵심 현안인 농업 및 수산업 보조금에 대한 합의는 무산됐다. 이 역시 회원국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인도의 목소리가 컸다.

어업협정 초안에 대해 인도는 다른 국가들보다 긴 전환 기간을 요구하면서 다른 나라들과 논쟁을 벌였고, 결국 최종 합의가 불발했다. 농업 협상도 곡물의 공공 비축 문제와 관련해 인도가 WTO가 제안한 임시 조치가 아니라 영구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면서 일부 선진국과 이견을 보이면서 합의하지 못했다.

한국과 칠레가 공동 의장국을 맡아 추진한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IFD) 협정’은 124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공동각료선언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 참여국들은 이 협정의 WTO 협정 편입을 공식 요청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WTO 출범 30년 만에 처음으로 복수국 간 협정을 WTO 협정에 신규 편입을 추진하는 사례”라면서 “이번 각료회의에서 WTO 회원국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인한 바 앞으로 WTO 일반이사회에서 논의를 추진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부 의미 있는 성과도 있었지만, 13차 각료회의 전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이번 회의가 “내가 기억하는 그 어느 때보다 국제사회에 큰 불확실성이 드리운 상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성취했지만 다른 것들은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의장국인 아랍에미리트의 타니 알 제유디 통상 장관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회원국들은 매우 중요한 몇몇 문서에 합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AFP통신은 세계무역을 위협하는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진행된 각료회의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두고 “다자간 무역 기구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평가했다.

정인교 본부장은 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WTO를 둘러싼 환경이 최근 들어 더욱 안좋아지는 듯 하다”면서 “신자유주의가 상당 부분 퇴조했고, 자국 이기주의 날이 갈수록 심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166국이 참가하는 WTO에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는 의제를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WTO 각료회의는 166개 회원국의 통상 담당 장관들이 참석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다. 안건을 만장일치 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안건 진전이 어렵다. 글로벌 분절화와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좀처럼 의사 결정을 신속하게 이뤄내기 어려운 구조다. 차기 14차 각료회의는 2026년 개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