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공정위가 금융, 통신, 사교육에 이어 라면 가격까지 경제 전반에 걸친 ‘경제검찰’ 행보를 강화하면서다.

공정위는 직원 한 명이 수십건을 동시에 맡는 일이 잦다 보니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 데 1년 넘는 시간이 소요되고, 깊게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소연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 들어 공정위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마저 커진 것이다.

인력 부족이 조사의 신뢰성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고자 공정위는 지난 4월 조사 업무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인력 충원 없이 이뤄지는 땜질식 처방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4월 26일 한화-대우조선해양 기업결합 안건을 다루는 전원회의에 참석하고자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 입장하고 있다. 이 당시에도 공정위는 늑장 심사를 벌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 뉴스1

◇ 대통령·총리 발언→공정위 조사

3일 정부·기업 등에 따르면 현재 공정위는 라면 등 주요 가공식품의 가격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제 밀 가격 하락에도 라면 값을 크게 올린 식품 기업들을 정조준하며 “공정위가 담합 가능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문한 데 따른 것이다. 농심·삼양식품 등이 제품 가격 인하를 선언했지만, 공정위는 시장 추이를 좀 더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앞서 공정위는 사교육을 조장하는 거짓·과장·기만 광고를 단속하겠다고 했다. 이때도 공정위는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 문항’을 중심으로 한 국내 사교육 시장의 이권 카르텔을 언급하자 행동에 나섰다. 공정위는 지난달 27일 ‘최단기 합격 공무원 학원 1위’라는 거짓·과장 광고를 한 혐의로 해커스 학원 운영사인 챔프스터디에 과징금 2억8600만원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금융권과 통신업권을 대상으로 대규모 담합 조사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 조사는 윤 대통령이 한기정 공정위원장에게 우리나라 금융·통신업 과점 체제의 폐해를 지적하며 “공정위는 경제부처가 아니다. 경제사법기관이 돼야 한다”고 당부한 직후 시작됐다. 공정위는 주요 시중은행과 보험사·증권사, 이동통신 3사 등에 잇따라 현장 조사 인력을 보내 업계를 긴장시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6월 27일 해커스 학원을 운영하는 챔프스터디에 거짓·과장 광고 혐의로 과징금 2억8600만원을 부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 문항’을 중심으로 한 국내 사교육 시장의 이권 카르텔을 언급한 이후였다. 사진은 서울 노량진역 인근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해커스 학원 광고. / 연합뉴스

◇ 日 1인당 5.2건 처리할 때 공정위 139건 다뤄

정부 조직인 공정위가 정책 의지에 맞춰 조사 대상을 정하고 법 위반 행위를 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공정위가 오랜 시간 인력 부족에 허덕여왔다는 점이다. 대통령·국무총리 말 한마디에 조사 인력을 갑자기 추가 배치하고 대응하기에는 이미 상당수 직원이 과부하 상태다. 한 공정위 직원은 “카르텔·하도급 등의 업무 영역에서는 한 명이 수십개 사건을 들고 있을 정도”라며 피로감을 드러냈다.

공정위가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공정위가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 데 쓴 시간은 평균 575일이다. 조사 단계에서 378일, 심의 단계에서 197일이 각각 소요됐다. 공정위의 평균 사건 처리 기간은 2017년 322일, 2018년 355일, 2019년 427일, 2020년 497일 등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재계에서 “공정위의 사건 처리가 너무 오래 걸려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힘들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깊게 파고드느라 오래 걸리는 거면 다행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 건수는 2016년 646건에서 2021년 1113건으로 늘었다. 하지만 기업결합을 심사하는 공정위 인력은 8명(2020년 말 기준)에 불과하다. 직원 1명이 2.6일에 한 건씩 연간 139건을 처리한다는 뜻이다. 심사 인력이 172명인 미국의 연간 1인당 처리 건수는 10.5건, 57명인 일본의 1인당 처리 건수는 5.2건이다.

그래픽=손민균

◇ 조사 기능 강화했어도 한계…의결서 발송도 느려

고질적인 인력 부족이 조직 전반의 신뢰성을 끌어내리는 배경으로 작용하자 공정위는 올해 4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기존에는 사무처장 산하 ‘9개 국·관, 39개, 과·팀’ 체제였는데, 이를 사무처장 산하 ‘4개 국·관, 18개 과·팀’과 조사관리관 산하 ‘4개 국·관, 20개 과·팀’ 체제로 나누는 내용이었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 부문이 조사에만 주력하도록 조사관리관(1급)을 신설해 정책과 분리했다”고 설명했다.

조직 개편 과정에서 공정위는 국제기업결합과를 신설해 직원 7명을 충원했다. 덕분에 기업결합 심사 인력이 총 15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직원 한 명이 처리해야 하는 연간 기업결합 심사 건수는 74건으로 해외 경쟁 당국과 비교해 여전히 많다. 공정위 내부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에서는 “시장에 대한 높은 이해를 공정위에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말까지 나온다.

공정위는 사건 처리뿐 아니라 법원 판결문 격인 전원회의 심의 의결서 발송 속도도 느리기로 유명하다. 일례로 카카오모빌리티는 콜 몰아주기 혐의로 지난 2월 과징금 257억원 징계를 받았는데, 공정위는 심의 이후 두 달 넘도록 의결서를 보내지 않았다. 이 역시 인력 부족에 따른 후속 절차 지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창현 의원은 “공정위가 정해진 기간에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혁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