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앙정부의 예산 중 이월·불용액을 합친 ‘미집행액’이 9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가운데, 특히 ‘불용액’이 급증해 13조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을 지출하는 과정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는 있지만, 대규모 미집행 사태가 발생한 것은 당초 사업 예산을 제대로 편성하지 못한 결과다.

집행률이 저조했던 주요 부처의 개별 사업들을 살펴보니, 각종 장려금·지원비 등 고용 창출을 위한 사업들에 예산이 과다하게 배정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정부는 미집행이 대거 발생한 사업을 활용해 올해 ‘세수 부족’에 대응하는 재원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입구에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 간판이 세워져 있다. /행안부 제공

◇ 미집행 많았던 불명예 부처 기재·행안·고용부

23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정부 예산의 이월액은 5조1000억원, 불용액은 12조9000억원을 기록했다. 총 18조원으로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25조3587억원) 이후 9년 만의 최대 미집행 기록이다.

예산의 이월(移越)은 사업의 변경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당해 연도에 집행하기로 예정된 사업과 예산을 다음 회계연도로 넘기는 것이다.

불용(不用)은 당초 확정된 사업에 계상된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예산이 지출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불용은 과다한 예산 책정에서 비롯되거나, 사업 계획의 미비 또는 사업 여건의 변화로 추진이 불가능한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불용은 이월에 비해 ‘행정 착오’에서 비롯된 성격이 비교적 강한 셈이다.

이월액이 많은 관서는 국방부(8597억원)·질병관리청(7954억원)·방위사업청(3820억원)·행정안전부(1190억원) 등이었다. 불용액이 많은 곳은 기재부(2조7534억원)·행정안전부(2조2940억원)·고용노동부(1조6000억원) 등으로 나타났다.

그래픽=손민균

◇ “청년고용·청사건축·ODA… 집행률 저조 사업 보니

기재부의 통합재정 정보공개 시스템 ‘열린재정’에 게재된 재정사업 집행 실적 자료를 분석 해보니 고용부의 경우 주로 고용 창출을 위한 사업 예산의 집행 실적이 저조한 편이었다.

집행률이 낮은 사업들로는 ▲가사 근로자 고용 개선 지원 25.99% ▲청년 추가 고용 장려금 37.74% ▲체당금 조력 지원(사업장 도산 등으로 임금·퇴직금을 받지 못한 돈을 국가로부터 대신 지급 받을 수 있도록 근로자에게 국선 노무사를 선임해주는 사업) 42.55% ▲청년 일자리 창출 지원 42.99% 등이 꼽혔다. 이들 사업은 집행률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행안부는 청사나 기관의 건축·운영 비용에서의 미집행이 두드러졌다. ▲세종청사 이전 지원 27.85% ▲국가정보관리원 대구센터 신축 44.27% ▲제주 4·3 피해보상 46.68% ▲외국 지방 공무원 교육 운영(ODA·공적개발원조) 53.78%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지원 54.44% 등의 집행률이 낮은 편이었다.

기재부는 예비비 주관부처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다른 불용액도 많았다. 예비비란 장래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지출로 인한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비축해둔 자금으로 기재부가 관리한다. 연초 ‘난방비 폭탄 대란’이 불거졌을 때 취약계층 지원용으로 예비비가 쓰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예비비 집행률은 48.46%였다.

기재부의 다른 사업을 보면 ▲경협 증진자금 이차보전(ODA) 0.93% ▲복권사업비 1.84% ▲노동 전환 지원금 1.96% ▲선박 온실가스 감축 지원 3.05% 등 한 자릿수 집행률을 기록한 사업들도 있었다. ▲지역 에너지센터 지원 15.24% ▲사업 전환 고용안정협약 지원금 16.78% ▲한국판 뉴딜 실무지원단 운영 29.03% ▲녹색 정책 금융 활성화 사업 30% 등도 집행률이 매우 낮은 사업이다.

이 밖에 국방부에선 각종 부대·훈련장 이전 비용, 방위사업청에선 무기 구매 비용 등에서 집행률이 0%에 가까운 것들이 있었다. 질병청에선 국립 심뇌혈관센터 설립 집행률이 0%, 국립목포병원 관련 사업들의 집행률이 20~30%대에 머물렀으며, 감염병위기대응국 관련 사업 집행률도 60~70%대로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그래픽=손민균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뉴스1

◇ “과다한 미집행액 발생, 제도 취지 훼손하는 것”

전문가들은 예산과 지출이 ‘미스매치’(부조화) 되는 구멍 사업들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추려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손종필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미집행액 특히 불용액이 과다하게 발생한 기재부·행안부·고용부 등 3개 부처의 세부 사업 분석을 통해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 여부와 정부 정책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특히 고용부는 국민취업지원제도·청년일자리창출지원사업 등 일자리 예산에서 불용액이 다수 발생했는데, 수요 예측의 실패와 대상·기간의 협소함에 따른 신청 저조 등의 사유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미집행액이 과다하게 발생하는 문제 자체도 근절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손 위원은 “예산의 운용상 이월이나 불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제도의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며 예산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라며 “매년 미집행이 발생하는 사업의 유형에 대해 예산 편성 단계부터 적정한 편성될 수 있도록 하는 관리 체계를 수립하고, 이월의 경우 현재의 연차별 배분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해 발생한 역대급 미집행액을 활용해, 올해 세수 결손 사태에 따라 부족해진 재정 여력을 보충할 방침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작년 결산·잉여금 등 모든 기금 재원을 살피고 있다”며 “법으로 정해진 범위 내에서 융통할 수 있는 부분을 살필 것이며 (올해 예산에 대한) 강제 불용이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