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메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불리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대한 한국 정부의 연내 가입 신청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회 상임위원회 보고 절차가 계속 미뤄지고 있어서다. 농축수산업계를 중심으로 한 CPTPP 가입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국회는 정부에 피해 보상책 등을 보강하라고 주문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로써 국회 문턱을 단기간에 넘기 힘들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통상 관련 국제 협력의 우선순위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칩4(Chip4) 등으로 옮겨가면서 CPTPP 가입 추진에 관한 정권 차원의 관심이 줄었다는 점도 연내 가입 불가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관가에서는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가 CPTPP 가입 신청 시점을 느닷없이 2022년 4월로 일방 통보하는 바람에 농어민 단체와 협의가 더 힘들어졌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원 등이 4월 4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광장에서 'CPTPP 저지 한국 농어민 총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 뉴스1

◇ 반발 여론 의식한 국회, 정부 가입 보고 안 받아

2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농림축산식품부·기획재정부 등은 현재 한국의 CPTPP 가입에 따른 국내 산업 영향과 보완 대책 등을 주제로 농축수산업계와 논의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 우려 업계의 반발이 워낙 거세 이견 조율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강행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커 신중하게 접근할 방침”이라고 했다.

앞서 정부는 문재인 정권 말이던 올해 4월 15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CPTPP 가입 추진 계획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의결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국회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중위)에 CPTPP 가입 신청 보고를 하려고 했다. 정부가 CPTPP에 가입 신청서를 내려면 국회 상임위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산중위는 농축수산업계의 강한 반발을 이유로 정부 보고를 받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산중위로부터 CPTPP 가입이 우리나라 농축수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명확히 파악하고 보완 대책도 보강하라는 주문을 받았다”며 “현재 그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문제는 정부가 피해 우려 업계와 대화에 나섰지만, 가입 반대 목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날로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일 전국 각지에서는 CPTPP 가입 추진 철회를 촉구하는 농어민 단체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달 16일 제주도에서 집회를 연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은 “CPTPP에 가입하면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 농산물이 수입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23일 일본에서 열린 IPEF 출범 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발언을 듣고 있다. / 뉴스1

◇ 尹정부, 미국 주도 IPEF·칩4 대응에 더 집중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정권이 바뀌었다. 윤석열 정부가 CPTPP 가입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정권 교체와 함께 통상 관련 국제 협력의 무게중심이 IPEF와 칩4 등으로 넘어간 건 분명하다. 특히 윤 정부는 미국 주도로 새롭게 구성된 IPEF 내 입지 다지기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IPEF는 인도·태평양 역내 국가 간 포용적이고 유연한 경제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일종의 경제안보 협력체다. 한국은 올해 5월 IPEF 출범 멤버로 합류한 상태다. 기존 회원국의 까다로운 가입 찬성 조건부 요구와 텃세를 감당해야 하는 CPTPP와 달리 갓 출발한 IPEF는 한국이 출범 멤버로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다.

미국은 중간선거가 열리는 11월 전에 IPEF 참여국 간 첫 번째 협상 개시를 원하고 있다. 산업부 통상교섭본부도 이 일정에 맞춰 ▲공정하고 회복력 있는 무역 ▲공급망 안정성 ▲인프라·청정에너지·탈탄소화 ▲조세·반부패 등 IPEF 4개 분야 의제를 준비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분간은 IPEF 대응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칩4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올해 3월 한국·일본·대만 등 3개국에 제안한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다. 퀄컴·엔비디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팹리스)을 보유한 미국과 삼성전자·TSMC 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석권한 한국·대만, 반도체 소재 분야 최강자인 일본이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기술 패권 경쟁 중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칩4를 구상한 것으로 본다.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차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기획재정부

◇ 文정부 일방적 4월 통보에 뿔난 농민들…尹정부 “설득 계속”

CPTPP 가입 신청 지연과 관련해 관계부처 내부에서는 문재인 정부와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 책임론이 제기된다. 홍 전 부총리는 작년 12월 27일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내년(2022년) 4월 중 CPTPP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농축수산업계는 물론 CPTPP 주무 부처인 산업부와도 사전에 조율하지 않은 발표였다.

이후 문 정부는 CPTPP 가입의 당위성을 적극 소개하며 여론 조성에 착수했고, 정권 끝 무렵이던 올해 3월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한국의 CPTPP 가입 신청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이 공청회는 현장을 장악한 농어민 단체의 거친 항의에 아수라장이 됐고, 행사는 1시간 만에 조기 종료됐다. 당시 ‘CPTPP 저지 한국농어민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는 “곧 끝날 정부가 임기 내내 가만히 있더니 떠날 때가 되자 갑자기 일하는 시늉을 한다”며 “더는 정부와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바통을 넘겨받긴 했으나 CPTPP 가입 신청을 위한 국내 이해관계자 설득은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CPTPP 가입 추진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피해가 예상되는 부분, 또 피해가 실제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보상하면서 진행하겠다”고 했다.

CPTPP는 일본·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국가가 참여한 초대형 FTA다.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 블록을 지향했던 TPP에서 탈퇴하자 2018년 일본을 중심으로 나머지 11개 국가가 출범시킨 경제 협력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CPTPP에 참여한 11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1조2000억달러로, 전 세계 GDP의 12.8%에 해당한다. 무역 규모는 5조7000억달러로 글로벌 무역액의 15.2%를 차지한다. 한국 수출액에서 CPTPP 11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3.2%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