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절 크게 흔들린 재정 건전성을 회복해 나라 곳간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전 정권 5년 동안 연평균 8.7%를 기록한 총지출 증가율(본예산 기준)을 5%대로 억제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조만간 공개되는 2023년도 예산은 640조원 안팎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0년 이후 최초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포함해 전년도 대비 대폭 감소한 수준으로 편성할 것”이라고 했다.
이달 3일 서울 마포구 백범로 서강대 게페르트 남덕우 경제관에서 만난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도 미래 관점에서 국가 재정 관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허 교수는 “고령화 지출이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결국 정부는 적자 국채 등을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채무도 문제지만 가계부채는 당장 더 시급한 과제라는 게 허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가계부채 규모도 우려스럽지만, 부채의 질 등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고물가·고금리 상태가 단기간에 끝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정부가 가계부채 해결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게 허 교수의 주장이다.
허 교수는 199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경제학도의 길을 걸었다. 주변 많은 가족·지인의 고통을 목격한 뒤 거시경제 현상과 경제정책 간 상호작용의 실체를 파악하길 원한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공적 영역에서 우리 경제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 허 교수의 바람은 그가 학자의 길을 걷기 전 통화 당국인 한국은행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음은 허 교수와 일문일답.
-최근 개인적으로 관심을 둔 연구 주제가 있는지.
“나랏빚이나 가계부채가 향후 경제 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진지하게 해보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중 나랏빚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고령화 관련 지출이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세금을 무작정 더 걷거나 세율을 가파르게 올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결국 정부가 적자 국채 등을 발행해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게 될 것이다. 미래 세대 생존을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본다.”
-가계부채도 심각하다고 보나.
“그렇다. 현시점에서 국가채무와 가계부채 중 어떤 게 더 시급한 현안인지 묻는다면 가계부채를 고르겠다. 단순히 부채 규모가 커서가 아니다. 가계부채를 주로 누가 떠안고 있고 부채의 질이 어떤지 등을 따져보면, 우리나라 가계부채 상황은 더 심각하다. 금융사 3곳 이상에서 대출받은 다중 채무자가 올해 4월 말 기준 450만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가계는 상대적으로 정부보다 돈을 빌리기 어렵다. 이 말은 훨씬 큰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고물가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금리 인상 흐름도 지속될 것인데 말이다.
최근 문우식 서울대 교수님, 박명호 한국외국어대 교수님과 국내 경제 분야 종사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질문 가운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염두에 둬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응답자의 30%가량이 가계부채 누증에 따른 금융 안정성 파괴를 꼽았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
“1997년 자연과학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가 수능을 다시 보고 1999년 3월 서울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처음 대학에 갔던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졌고, 내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많은 이가 실직·폐업 등의 고통을 겪었다. 그 일을 지켜보면서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동시에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경제가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직접 그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나.
“집안에 경제학 전공자가 있던 건 아니다. IMF 사태에 대한 내적 분노와 호기심이 동력이었다. 그런 감정을 마음의 빚처럼 계속 안고 살다 보니 수능을 다시 보기에 이르렀다. 막상 서울대에 가서는 공부보다 밴드 활동에 더 심취했지만 말이다(웃음).”
-미국 유학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결정한 건가.
“대학 졸업 후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대했다. 군에서 진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학부 지도 교수였던 박준용 교수(현 성균관대 석좌교수)께서 유학을 권유했다. 일과 후 개인 정비 시간에 공부하고 휴가 나오면 시험 보는 식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와 전역하자마자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유학 가서는 좀 더 진지하게 학업에 매진했다. 경제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IMF 사태이다 보니 연구 주제도 자연스레 거시경제 쪽으로 갔다. 그중에서도 경제정책의 효과에 특히 관심이 쏠렸다. 인디애나대 지도 교수인 에릭 리퍼(Eric Leeper) 교수가 그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였다. 많이 배웠다.”
-리퍼 교수를 좀 더 소개해달라.
“리퍼 교수는 201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리스토퍼 심스 미국 프리스턴대 교수의 제자다. 심스 교수는 벡터자기회귀모형(Vector Autoregression)을 토대로 경제정책과 각종 변수가 일시적으로 변할 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한 인물이다.
심스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리퍼 교수 역시 정책과 정책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주목했다. 더욱이 리퍼 교수는 사회 커리어를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산하 브런치에서 시작한 뒤 학계로 옮겨온 케이스였기 때문에 정책 효과에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 간 조화를 강조한 것도 리퍼 교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통화 정책을 다루는 사람은 통화 정책만 보고, 재정 정책 다루는 이는 재정 정책만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물가가 오르면 흔히 ‘통화 정책이 뭔가 해줘야 한다’ 정도만 생각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재정 정책도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간단한 예로, 정부가 재정 적자를 확대하면서 지출을 늘리면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가능성이 커진다. 리퍼 교수는 이러한 연관성을 항상 잘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가를 결정하는 건 통화 당국인 동시에 재정 당국인 셈이다. 둘의 조화는 이제 필수다.”
-한국으로 돌아와 통화 당국인 한국은행에 입사해서도 이런 철학을 갖고 일했나.
“물론이다. 한은 역시 통화 정책이 중심이지만 재정 정책에 대한 관심도 컸다. 한은 경제연구원에서 일하며 내가 맡은 역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통화 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거시 정책 수단인 재정 정책 관련 연구도 병행했다.”
-한은에서 기억에 남는 연구 성과를 소개해달라.
“재정 정책 연구 사례를 소개하자면, 세금을 줄였을 때와 정부 지출을 줄였을 때 우리나라 재정 승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분석한 연구가 기억에 남는다. 2017년쯤 수행했다. 또 지출 항목 중에서는 이전 지출이 더 큰지 소비 지출이 더 큰지, 감세 항목 중에선 어떤 세금 항목을 낮추는 게 효과적인지 등도 들여다봤다.
당시 연구 결과는 감세 승수보다 지출 승수가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상 우리가 이전 지출에 대해서는 경기 부양 효과가 낮다고 생각하는데, 내 연구에서는 다른 소비 지출과 비교해 이전 지출의 경기 부양 효과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정부가 만족할 만한 경제정책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감세와 지출을 적절히 혼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면서 보니 가방에 한은 배지가 달려 있더라. 한은을 떠난 지금도 애정이 상당한가 보다.
“지인들로부터 ‘한은에서 최소 10년은 일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로열티를 갖고 있다. 실제로 일한 기간은 18개월에 불과한데 말이다(웃음). 일단 그 시절 동료들이 인간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출중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걸 배웠다. 지금도 그들과 6개월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한다. 내가 총무다.
그리고 이건 좀 거창한 표현일 수 있는데, 내게 경제학 공부의 출발점이 IMF 금융 위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늘 공적인 기여에 관한 욕구가 있었다. 좋은 기회에 훌륭한 은사님을 만나 공부했으니 이를 우리 국민이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갈망과 포부가 한국은행을 통해 일부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책 기관에서 경험이 현재 교수로서 연구 생활에도 도움을 주는지.
“큰 도움이 된다. 요즘 지도 학생들에게 ‘책 속에 갇히는 건 좋은데, 책 속에서 그대로 끝나 버리면 경제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내게 한은은 뒤늦게 경제학 공부를 시작해 책 속에만 머물던 나를 책 밖으로 꺼내준 곳이다. 경제 이론이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전개되고, 이를 정책이 어떤 식으로 추적하는지 알려줬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미국에서 취득했다. 나도 모르게 미국의 학문 흐름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많다는 의미다. 한은 경험이 없었다면 미국 논문에서 본 걸 한국 상황에 그냥 적용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하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한은 생활을 통해 미국과 본질적으로 다른 우리 경제에만 해당하는 특수성이 있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정책을 수립할 때도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을 잘 알게 됐다.”
-요즘 학교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홍상수 감독의 2015년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경제학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특정 시기에 호평받은 경제정책이 다른 시기에도 좋은 정책일 가능성은 낮다. 정책 효과는 해당 경제가 어떤 국면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간 변화에 따른 정책 효과의 가변성을 파악하는 게 내 연구의 큰 흐름 중 하나다.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이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린 건 그때가 1970년대 초고금리 시절이기 때문이지 않나. 또 똑같이 매파적인 정책이라고 해도 경제 국면이 어떤가에 따라 공급 측 충격이 심할 수 있고 수요 측 충격이 더 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