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의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꼽히는 ‘가계부채’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한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국내 가계부채는 개인별 단위로는 집계되고 있으나, 가구별 전수 통계 자료는 없다. 가계부채의 실질적인 관리를 위해서는 마치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처럼 가구 단위로 묶어 소득·자산 등 상환 능력을 고려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제언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지만, 그 시도가 번번이 실패했었다.

이런 가운데 해당 통계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 작업을 최근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주도해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 교수는 한국 고유의 전세·준전세 제도가 존재해 이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행 통계 방식에선 가계부채 총량이 크게 과소평가 됐을 수 있다는 등의 목소리를 내온 인물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에 따른 기준금리 인상 추세 속에서 1800조원 규모의 가계부채가 한국 금융위기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인 가운데, 윤석열 정부의 ‘통계 데이터 플랫폼’ 구축 의지 등이 맞물려 가구별 부채 통계의 공공 데이터화가 조만간 현실화할지 주목된다.

지난해 8월 서울대 사회과학대에서 김세직 경제학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고운호 기자

◇김세직 교수팀 연구용역…‘전세보증 포함’ 통계 나오나

9일 관가와 학계에 따르면, 통계청이 지난 2월 발주한 ‘가구별 부채 심층분석 연구 사업’ 연구용역에 김 교수팀이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을 통해 선정돼 한창 연구가 진행 중이다. 민간이 보유한 신용정보와 통계청 등 공공 데이터를 연계해 가구별 부채 통계 생산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오는 9월 최종 보고 등 연구용역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간 가계부채 통계는 개인(차주) 단위로만 잡혀 산출됐다. 한국은행의 ‘가계신용(은행 등 금융기관 대출 또는 외상으로 물품을 구입한 대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차주의 소득과 자산 정보가 고려되지 않은 단순 대출 총량에 대한 수치이며, 입수된 정보가 가구가 아닌 개인 기준이라 실질적인 부채 상환능력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반쪽짜리 통계’라는 지적을 받아온 이유다.

통계청·한은·금융감독원이 매년 발표하는 ‘가계금융복지(가금복) 조사’란 가구 단위 통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여기엔 주택담보대출·신용대출 등이 부채로 잡힐 뿐 전세·상가 등 임대보증금 대출, 자영업자 등 개인사업자 대출 등은 빠져 있다. 더욱이 가금복은 2만 가구만을 표본으로 하는 데이터여서 정확도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가구별 가계부채 파악은 통계청이 ‘포괄적 연금 통계’에 이어 두번째 역점 과제로 꼽는 사업이기도 하다. 국가 정책적으로도 10년 가까이 논의돼 온 사안이지만, ‘부처 칸막이’ 문제에 가로막혀 번번이 추진이 무산됐다. 2014년 19대 국회 때 정희수 당시 기획재정위원장이 한은에 이런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논의가 급물살을 탄 적 있으나, 결국 한은·국세청·통계청 등 관련 부처의 이해관계가 봉합되지 못하면서 지지부진해졌다.

2014년 당시 정희수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다시금 해당 통계 DB화에 드라이브를 걸게 될 김세직 교수는 우리나라 가계부채 파악이 과소 평가돼, 이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통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해왔다. 그는 ‘한국 경제 5년 1% 하락의 법칙’을 강조해 온 경제학자로도 유명하다.

김세직 교수팀의 합류로 이번 연구를 통해 한국 전세제도의 특수성을 고려한 통계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결론을 내놓을지가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그는 최근 한 언론 기고를 통해 “전세 및 준전세 보증금은 집주인이라는 가계(household)들의 부채”라며 “한국은행의 가계신용처럼 금융기관으로부터의 가계대출(간접금융)만을 집계한 가계부채 통계만으로는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총량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세보증금과 준전세 보증금이라는 가계부채(직접금융)를 금융기관을 통한 가계부채에 더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2020년 우리나라 전세·준전세 보증금 부채를 851조원으로 추산했다. 2021년 이 값이 변하지 않았다는 보수적인 가정 하에 현 통계 방식으로 집계한 가계신용 1862조원을 더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실질적인 가계부채 총량은 2713조원에 이른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130%를 넘는 수준이다. 기존 통계 방식으로 집계 때(지난해 3분기 기준 106.7%)보다 가계부채에 따른 위험도가 훌쩍 확대되는 것이다.

한 통계청 관계자는 “전세 보증금을 비롯 월세 대출 문제, 금리 변동 연계 등이 가능한지 계산 고려 항목들에 대해 다양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4년 치 데이터를 통해 어느 정도 분석 결과를 도출한 뒤 이것이 상시로 생성해야 하는 통계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는 것이 최종 과제”라고 설명했다.

류근관 통계청장. /통계청 제공

◇작년 ‘비공개 시뮬레이션’도 진행…금융위·국세청 등 협조 유도 관건

김 교수팀의 연구와 별도로 통계청 역시 해당 통계 산출을 위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통계청 내부에서 공공·민간 데이터를 수집해 새로운 통계 분석을 발굴하는 ‘빅데이터통계과’가 이를 주도하고 있다.

통계청은 우선 나이스평가정보·코리아크레딧뷰로(KCB) 등 신용평가사와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신평사에서 받은 금융권 대출 규모·유형·신용점수 등의 익명 데이터에 통계청의 인구조사 데이터를 합쳐 잠정적으로 가구별 부채 현황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아직 자산이나 소득 정보를 충실히 대입하지 못한 버전이지만, 나름 유의미한 결과값이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통계청은 신평사와 과거 3년 치 전수 데이터를 결합해 지난해 가구별 부채 통계 산출에 대한 비공개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이른바 ‘프리(pre·사전) 분석’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아직 불완전하긴 하나, 시장에서 피상적으로 느꼈던 것들이 실제 숫자로 잡히는 흥미로운 결과들이 여럿 발견됐다”며 “예로 부유층이 자녀를 세대 분리하면서 주택 수를 늘려가는 것이나, 부모 세대의 주택 규모에 따라 자녀 1인 가구 거주 지역이 어떻게 갈리는지 등의 내용이 관찰됐다”고 했다. 이 결과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향후 김 교수의 연구용역을 통해 해당 통계의 상시 데이터화 필요성이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득이나 부동산 자산 데이터를 제공받기 위해선 국세청이나 국토교통부의 협력이, 금리 연동 등을 위해선 민간은행 혹은 이들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부처 간 칸막이로 난항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포괄적 연금 통계’ 개발 때처럼 부처 간 비협조 논란이 재연될 수도 있다. 공적·사적연금과 관련해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 개인연금은 국세청, 주택연금은 금융위원회·주택금융공사 등에 자료가 흩어진 탓에 이들의 연계를 합의하는 데만 1년여가 소요됐다. 통계청이 부처 사이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위가 아닌 데서 문제가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통계청을 ‘통계데이터처’로 격상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편 이 작업을 이어갈 차기 빅데이터통계과장의 인선도 주목된다. 2017년 민간에서 개방형 직위로 임용돼 통계청에서 일해 온 윤지숙 전 과장은 최근 창업 준비 등의 사유로 퇴사해 해당 자리가 공석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