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물가지수가 넉 달째 3%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작년 4월부터 10개월 연속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 2%를 초과하는 물가 상승 흐름을 지속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막겠다며 수시로 각 경제 부처를 동원해 민생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품목 가격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물가를 관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소비자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마저 10년 만에 3%대로 올라섰다. 물가 불안이 농산물과 석유류 등 공급 측 요인에 머무르지 않고 서비스값 등 수요 측 요인으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가격 통제 위주인 문재인 정부의 물가 관리가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기업 경영 활동에 방해만 된다고 지적한다. 소비자는 치솟는 물가에 고통스러워 한다. 정부가 개별 품목 가격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공급난 해결 등 국가 차원의 이슈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또 전문가들은 이런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추가경정예산(추경)과 같은 ‘나랏돈 풀기’도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 3% 넘어선 근원물가…중장기 상승 국면 진입
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04.69(2020=100)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6% 상승했다. 소비자물가는 작년 4월 2.5%를 시작으로 9월까지 2%대를 지속하다가 10월부터 3%대로 치솟았다. 물가가 넉 달 연속 3%대 상승률을 보인 건 2010년 9월부터 2012년 2월까지 18개월 연속 3% 이상 상승률을 기록한 이후 10년 만이다.
이에 대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면서도 “물가가 오르는 원인을 보면 상당 부분이 원유 가격 상승을 포함한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여파가 밀려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가 물가 잡기에 실패하는 이유를 외부에서 찾은 것이다.
이런 변명은 군색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제유가 상승 등 해외 측 요인을 이유로 든 홍 부총리의 발언과 달리, 지난 1월에는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도 전년 동월 대비 3.0% 상승해서다. 2012년 1월 3.1%를 기록한 후 10년 만에 최고치다. 근원물가가 올랐다는 건 물가가 공급 측의 일시적 충격으로 급등한 게 아닌, 중장기적 상승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원자재와 농축산물 가격 오름세에서 시작된 물가 대란이 연쇄적으로 공산품과 서비스 가격까지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맞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앞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달 14일 발표한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월 전망 경로를 상회해 상당 기간 3%대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 근원 인플레이션율도 2%를 상당 폭 상회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 기업 불러 공정위 보는 앞에서 “가격 올리지 마”
물가 상승 압력이 서비스 가격 등 수요 측으로 전이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정부가 물가 관리 방식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그동안 물가 부담을 촉발하는 개별 품목의 공급을 늘리거나 가격 상승 요인을 이연시키는 식으로 물가 상승률을 낮추려고 했다.
작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계란 가격을 언급하며 “생산-유통-판매 단계를 점검하라”고 주문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대통령 한 마디에 기획재정부와 농림축산식품부가 계란값 잡기에 나섰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양계 업계의 담합 가능성까지 들여다봤다. 물가가 3%대로 솟구친 지난해 말에는 기재부가 ‘물가 부처 책임제’ 도입을 선언하면서 경제 관련 부처들의 시장 개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각 부처가 학원비·식품·자동차 등의 가격을 면밀히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농식품부는 지난달 중순 농심·대상·CJ제일제당 등 5개 기업을 불러 제품 가격 인상을 최소화하라고 요구했다. 이 자리에는 공정위 관계자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설 연휴를 앞두고도 정부는 설 물가 안정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이억원 기재부 1차관은 지난달 28일 “쌀을 포함한 17개 품목 중 사과를 제외한 16개 품목의 가격이 하락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올해 설 명절 제수용품 구입 비용은 평균 28만7866원으로 3주 전보다 1.4%포인트(P) 올랐다.
이 같은 품목 관리 위주의 물가 대책이 장기간 이어지다 보니 시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수시로 나서서 정부 주도의 물가 관리 시스템을 가동하고 기업 활동을 감시했는데, 결과적으로 물가는 하나도 안 잡히고 경제활동 주체만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품목 관리는 각종 비용 상승 요인을 상품 가격에 반영하려는 기업 의사결정 과정과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
◇ “돈 뿌리면서 물가 잡겠다니”
전문가들은 정부가 특정 품목을 지정해 가격을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국민이 체감할 만한 물가 안정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장민 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물가 부처 책임제에 대해 “실효성을 기대하긴 어렵다”며 “수요를 통제할 순 없으니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일 텐데, 없는 공급량을 공무원이 만들어 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로서는 물가가 오르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품목을 찍어서라도 관리하려는 게 꼭 틀린 방향은 아니라고 본다”면서도 “다만 물가 상승세를 실제로 억누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김 교수는 “공급난 해소, 원자재 공급 원활 등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야 한다”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유동성 관리’를 물가와 관련된 정부 과제로 꼽았다. 성 교수는 “정부가 새해 시작부터 14조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했는데, 지금과 같은 인플레이션 분위기에서는 유동성 공급에 신중해야 한다”며 “정치권에 휘둘려 과잉 유동성을 남발하면서 물가를 잡겠다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