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이면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돌아온다. 그리고 올해 주총 시즌의 최대 이슈 중 하나가 집중투표제 도입 열풍이다.

집중투표제는 소액주주가 합심해서 원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이른바 ‘대주주 견제책’이다. 각 주주가 이사 후보의 수만큼 의결권을 받아서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다. 대주주가 원하는 이사를 대거 선임할 수 있는 단순투표제와 달리, 소수주주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순기능을 지닌다.

집중투표제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일등공신은 고려아연이다. 최윤범 회장이 영풍-MBK파트너스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지난달 임시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안을 통과시켰다. 소수주주가 기존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해 집중투표를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아연의 경우는 이례적이다. 영풍-MBK가 경영권 분쟁을 시작한 쪽이지만 지분율로 보면 대주주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아연의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 훗날 고려아연 사례가 교과서에 실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온갖 경영권 방어 기술이 등장했는데, 집중투표제는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주총을 앞둔 기업의 주주들이 너도나도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을 상정하고 있으니,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고려아연이 우리 자본시장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인 곳이 코웨이다. 넷마블이 지분 25%를 보유한 최대주주인데, 얼라인파트너스는 넷마블이 낮은 지분율로 경영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을 제안했다. 최윤범 회장 측 계열사 영풍정밀도 영풍을 상대로 집중투표제 도입을 제안하고 나섰다. DB하이텍 경영진과 소액주주들도 집중투표 허용 여부를 놓고 주총에서 맞붙으며, 롯데쇼핑과 이마트 역시 소액주주가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한 상태다.

집중투표제가 대주주를 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인 것은 사실이다. 단순투표 시스템하에서는 대주주가 과반의 지분으로 이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원하는 대로 선임할 수 있지만, 집중투표제가 도입된다면 소수 주주도 얼마든지 자신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이사를 선임해 대주주의 방만한 경영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중투표제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완벽한 제도이지도 않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집중투표제를 의무 도입하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봤더니, 주요 선진국 중에서 집중투표 도입을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집중투표제를 강제하는 국가는 러시아·멕시코·칠레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는 집중투표제가 순기능에 못지않게 역기능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수주주의 의견을 대변하는 이사가 이사회에 진입할 경우,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단기적 주가 상승이나 배당 확대만 추구할 우려가 있다. 소수주주는 어디까지나 소수주주다. 대주주와의 분쟁을 통해 경영권을 갖고 회사를 운영할 게 아니라면, 이들 입장에선 장기적 성장보단 주가 상승과 주주환원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사의 존재는 기업의 성장과 혁신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이사회 구성이 정치화할 우려도 있다. 소액주주들이 각자 이익에 맞는 후보를 올리기 위해 투표하다 보면, 정치적 계산이 개입되는 걸 막기 어렵다.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이사를 선출함에 따라 정치적 논리나 인맥에 의한 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 그 외에도 소수주주의 경영 간섭이 과도해져 효율성이 떨어지고 기업의 방향성이 혼란스러워질 우려가 있다.

야당은 최근까지 상법 개정안에 대규모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포함하고자 했다. 주요 선진국 중 이례적으로 집중투표제를 강제하는 나라가 될 뻔했다. 다행히도 재계의 거센 반발에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빠진 채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불씨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집중투표제 도입은 법으로 의무화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처럼 주주들이 제안해 의안을 상정하고 투표로 결정하면 된다. 집중투표 허용을 위한 정관 변경에는 의결권 67%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사의 경우 의결권 행사가 발행주식총수의 3%로 제한되는 ‘3%룰’의 적용을 받아 소수주주도 얼마든지 집중투표제 도입을 추진할 수 있다.

경영진에 문제가 있는 회사라면 주주들이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그걸 나라에서 법으로 강제해야 할 만큼 주주들이 무능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