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철강업체 관계자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근심이 가득하다. 가뜩이나 경기 불황 속 중국의 저가 공세, 달러당 1450원대로 오른 고환율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관세 폭탄이 투하되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국내 10대 수출 산업인 철강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가 관세를 부과할 유력 후보 업종 중 하나다.
현재 한국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철강은 연간 263만톤(t)으로 정해져 있다. 이 물량엔 무관세가 적용되고 그 이상은 수출할 수 없다. 트럼프 1기(2017년 1월~2021년 1월) 한·미 협상의 결과다. 트럼프 1기 정부는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당시 주요 철강 수출국인 한국엔 관세를 부과하는 대신 쿼터제를 도입해 철강 수출량을 제한했다. 2015~2017년 평균 수출량의 70%만 수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철강업계에선 트럼프 2기 정부가 쿼터 물량을 줄이거나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2기 관세 전쟁은 4일 대중(對中) 관세 인상 행정명령이 발효되고 중국이 즉각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 현실화됐다. 같은 행정명령에 담겼던 멕시코·캐나다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는 발효 직전 한 달간 유예됐다. 멕시코·캐나다가 미국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트럼프식 협상의 기술이다. 멕시코·캐나다에 생산기지를 둔 한국 기업은 당장 숨을 돌리게 됐으나 상황이 언제든 바뀔 수 있어 불안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이용해 미국 제조업 부활을 노리고 있다. 1기 재임 때 한국산 세탁기에 고율 관세를 매겨 삼성전자, LG전자가 미국 공장 생산량을 늘린 것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는다. 현대차그룹이 지난해 10월부터 가동을 시작한 조지아주 공장을 관세 부과 가능성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라고 평가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현대제철은 트럼프 2기 관세 무기화 기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미국 내 제철소 건설을 추진 중이다.
한국은 2023년 기준 미국과의 무역에서 8번째로 큰 흑자를 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무역 흑자국 위주로 손을 보고 있다. 조만간 반도체·석유·가스·철강·알루미늄 등에도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수가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다.
관세 전쟁을 앞두고 한국 경제와 산업의 위기감과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대부분 무관세인 한국 수출품에 10~20%의 관세가 부과되면 대미(對美) 수출은 치명타를 입는다.
위기에는 기회도 잠재돼 있다. 일각에선 미·중 무역 전쟁 재점화 국면에서 한국이 믿을 만한 공급망으로 부각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트럼프 2기의 중국 견제 및 배제 기조 속에서 한국 주요 산업이 전 세계 공급망에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2기 당선 후 직접 협력을 요청한 조선업이 한 예다. 최근 한·미는 세계 원전 시장 공동 공략을 위한 원자력 동맹에도 합의했다. 방산·인공지능·에너지 등 다른 핵심 산업에서도 한·미 협력 기회를 잡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은 분명하다. 관세로 압박하고 협상에서 우위에 선 후 실리를 챙긴다. 상대를 코너에 몰면서도 늘 협상의 여지를 열어둔다. 한국 역시 협상에서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계엄·탄핵으로 국가 리더십이 공백인 상태에서 대한상공회의소 주도로 20대 그룹 경영인들이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정부와 미 경제계의 주요 인사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기업들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