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이달 초 삼성글로벌리서치에 사장급 조직인 경영진단실을 신설, 삼성전자를 비롯해 계열사 전반에 대한 경영진단을 실시하기로 했다. 말 그 자체로는 삼성의 현 상황을 진단한다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2010년대 초 삼성 미래전략실의 ‘무자비한’ 경영진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성 반도체를 비롯해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 수많은 계열사들은 과거 미래전략실이 ‘실적 만들기’식으로 진행했던 고강도 감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뼛속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트라우마는 단순히 경영진단실의 신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가 이번 인사를 통해 과거 미래전략실 출신 베테랑 경영자들을 대거 요직에 앉혔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 삼성전자는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과 한종희 DX부문장(부회장)을 유임시켰을 뿐 아니라 재무통이자 미래전략실 경영진단의 핵심이었던 박학규 사장을 사업지원TF 담당 사장에 앉히며 ‘과거의 방식대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메시지를 전 계열사에 전달했다.

이번에 삼성글로벌리서치 경영진단실장으로 선임된 최윤호 사장의 경우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삼성 미래전략실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전략1팀 소속으로, 미래전략실 경영진단이 ‘악명’ 높았던 시기의 핵심 인물이다. 소위 ‘서초동’으로 불리는 삼성전자 사업지원TF와 삼성글로벌리서치는 모두 삼성 서초사옥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삼성은 오랜 기간 경영진단이라는 방식을 통해 계열사를 컨트롤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적이고 무자비했던 시기가 바로 2010년대초 였다”며 “당시에는 경영진단팀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남아있는 게 없다는 속설이 돌 정도로 검찰 조사보다 더한 수준의 감사, 특정 인물에 대한 신상 조사와 채증 활동 등이 난무했고 그 중에서도 ‘저승사자’로 유명했던 인물들이 이번 인사에서 요직을 차지했다”고 전했다.

당시 미래전략실이 경영진단을 실적 올리기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문제를 만들어 인위적인 감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다. 경영진단의 압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옛 삼성테크윈의 한 고위 임원은 경영진단팀과의 면담에 본인이 선임한 변호사를 대동하고 들어갈 정도였다.

물론 경영진단의 순기능도 분명 존재한다. 전자, IT, 부품, 소재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삼성의 사업 영역을 아우르는 컨트롤타워로, 계열사간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각 계열사가 업무 프로세스를 선진화,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싱크탱크 조직으로서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2010년 이후 세계 정상에 오른 삼성 모바일 사업과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세계 1위 DNA·노하우를 계열사에 전수한다는 측면에서 경영진단의 취지 그 자체를 나쁘게 볼 순 없다.

다만 삼성의 경영진단 방식도 과거의 방식 그대로를 답습해서는 안된다. 감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은 결국 조직 자체의 존립 근거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문제를 찾아내려 하는 속성을 내재한다. 경영진단실의 실적을 위해 계열사의 단점을 잡아내 잠재력이 있는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셧다운’시킨다거나 재무 중심적 관점에서 계열사의 업무 효율성을 뜯어고치는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기술 기업의 근본을 훼손한다는 점을 일본 소니나 미국 인텔 등과 같은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이 때문에 삼성의 경영진단은 감사보다는 삼성글로벌리서치의 기존 기능을 기반으로 경제, 경영, 산업, 금융 등 전문적인 연구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위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지원 조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업지원TF와 함께 계열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보며 소통과 지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 글로벌 경제 위기 가능성이 고조되는 현 시점에서 위기 감지와 선제적 대응은 더 중요해졌다.

이번 경영진단실 신설은 특히 삼성 반도체가 저지른 지난 수년간의 실책에 대한 예방 기구적 성격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대역폭메모리(HBM)팀 해체와 같은 실책을 미리 방지하고 파운드리, 시스템LSI 등 다양한 분야에 팽배한 무사안일주의와 허위 보고, 품질 검증과 관련한 프로세스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또 경쟁사에 점점 밀리고 있는 부품, 소재 분야에서의 혁신을 위한 R&D 조직 개편과 적극적인 인수합병(M&A),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의 설비투자, 빠른 의사결정이 이뤄지도록 컨트롤타워의 순기능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