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사회·지배구조(ESG·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는 끝없이 미루기만 하는 숙제였죠. 그런데 이젠 속도가 붙을 것 같습니다. 다들 내색은 안 하지만 기대감을 높이는 중입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이후 만난 한 회계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 당선으로 ‘ESG 공시 도입’이 ‘드디어’ 진도가 나갈 것이란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진보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의 주요 공약을 보면, ‘성장 기반 구축’ 항목에 ‘상장회사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공시 신속 추진’이 포함됐다. 또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지속가능성 공시 조기 의무화 로드맵을 제시할 것인지를 묻는 설문조사에 ‘찬성’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는 응답하지 않았다.
ESG 공시 도입에 찬성하는 쪽이 들썩이는 이유는 현재 금융당국의 ‘ESG 공시 도입’이라는 시계가 사실상 2023년 10월에 멈춰있는 탓이다. 당시 열린 제3차 ESG 금융추진단 회의에서 금융위원회는 ESG 공시 의무화 시기를 2026년 이후로 연기한다고 밝혔다. 이후 약 6개월이 지난 2024년 4월 금융위는 제4차 회의를 열었지만, 이때도 도입 시기와 대상 등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같은 달 베일에 싸여있던 ESG 공시기준 초안이 공개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의무화 시기에 대한 견해차가 첨예하다 보니 우선은 공시 기준이라도 만들자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산업계의 가장 큰 걱정거리로 꼽히는 ‘스코프3’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 방법은 결정이 보류됐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는 손님한테 앙꼬없는 찐빵을 내놓은 셈이다.
멈춘 시계를 돌릴 유일한 실마리는 지난해 12월 30일 나왔다. 김소영 당시 금융위 부위원장은 올해 상반기 안에 구체적인 공시 기준과 로드맵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해가 지나도 금융위는 침묵을 이어왔다. 지난 4월 열린 제5차 회의에선 주요국의 ESG 공시 동향을 반영해 일정을 재검토하기로 했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올 상반기의 마지막 달인 6월 ESG 공시 정책 로드맵 발표를 할 예정이라는 지난달 한 매체의 보도에는 “검토 중인 사안으로 구체적인 발표 일정이나 내용은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해명했다.
금융위가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배경엔 재계의 반발이 있다. 기업들은 이미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 자율 공시를 통해 투자자 등 시장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며 ESG 공시를 도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유럽 등과 달리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구조적 특수성이 있어 더 많은 준비 시간과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ESG 공시 의무화를 2028년이나 2029년 이후로 늦춰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올 초 미국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대다수 기업이 ESG 관련 활동 속도를 늦췄다. KB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 5월까지 밸류업 공시를 한 기업 143곳 가운데 ESG 관련 내용을 포함한 기업은 42곳(약 29%)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조차도 현재 상황과 대략적인 목표만 공개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송수영 세종 변호사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회계기준원이 마련하고 있는 한국형 ESG 공시 기준 도입과 함께, 상장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보고 의무화의 적용 범위와 추진 방식 등을 둘러싼 논의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기업은 ESG 성과 공시를 위한 공시 기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ESG 성과 보고를 위한 역량과 거버넌스 구축, 내부 통제 체계를 갖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기후에너지부도 조만간 신설될 것으로 보인다. 담당 부처가 생긴다면 자연스레 ESG 공시 의무화를 비롯해 탄소중립산업법 제정 등 ESG 강화 정책 역시 뒤따라올 것이다.
한국만의 특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기업의 주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단 테이블에 앉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무조건 안된다면서 대화에도 나서지 않는다면 향후 글로벌 기준이 생겼을 때 어떻게 대응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한들 약 2년간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