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대중을 선동하는 단골 전략 중 하나는 ‘시스템 오류’다. 개인의 문제나 특정 집단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을 때, 그 틀 자체가 잘못됐다는 착각을 심어주면 된다. 불공정한 시스템의 희생자로 인식하는 순간, 패자는 절대선(善)으로 둔갑한다. 반성이나 성찰 같은 건 필요 없다. 틀린 체제를 갈아엎는 것만이 올바르며, 설령 못 하더라도 상관 없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믿음 뒤에 숨으면 된다.

12·3 비상계엄이 그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올해 초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첫 변론에 출석해 한 말은 “선거 공정성 신뢰에 의문이 드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은 정당하다”였다. 당은 음모론과 동거했다. 부정선거에 직접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국민적 의구심이 있다”며 제도를 뒤엎자고 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아예 “사전투표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선관위가 부정을 저지를까봐 못 믿겠단 뜻이다.

‘불공정 시스템’에서 치러진 총선 백서는 이미 관심 밖이 됐다. 범야권 192석 책임론을 두고 집권당이 장장 6개월을 싸운 결과물이다. 원외 극우 인사를 중심으로, 선거 시스템 자체가 잘못됐으니 ‘졌지만 진 게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유권자에게 외면 당한 이유를 찾는 대신, 제도를 때려 부수자는 소리가 슬그머니 나온 시점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친윤계의 부정선거를 “극우 망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몸집을 키운 부정선거론은 파면 당한 대통령을 당당히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영돈 감독이 부정선거론자 유튜버들을 취재한 뒤, 그 주장을 확정된 사실처럼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자 관중석에선 “아멘”이 나왔다고 한다. 아멘은 ‘참으로 확신한다’는 히브리어다. 감독은 영화 초반 “부정선거 취재를 두려워말라는 신의 계시를 들었다”고 했다. 불공정하다는 착각이 신앙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는 방증이다.

이런 신앙엔 진영도 따로 없다. 이재명 후보도 재미를 톡톡이 봤다. 성남시장 재직 때인 2017년 일이다. 그는 성남시장 신분으로 SNS에 ‘18대 대선은 전대미문의 부정선거, 투표소 수개표로 개표부정 방지해야’라는 제목의 글을 직접 썼다. 국가기관이 대대적으로 선거에 개입했고, 전산개표 부정을 입증할 만한 근거들이 드러났다고 했다. 개표부정을 밝히고 수(手)개표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응원한다고 적었다.

당시 진보진영은 개표부정론에 기대 박근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부 시민단체가 전자개표기 사용 및 선거결과 조작설을 제기하자, 국회의원과 현직 지자체장이 불을 지폈다. 정치권이 부추긴 착각은 촛불시위 참가자를 분신으로 내몰았다. 사태가 커지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객관적 근거 없이 개표부정 의혹을 제기해 국민적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는 입장을 냈다.

그로부터 8년 뒤, 선관위는 변하지 않았고, 이재명 후보는 ‘부정한 시스템’에서 치러지는 대선에 출마했다. 과거 개표 음모론에 동조한 사실도 부인했다. 직접 작성한 글이 남아있지만 침묵하고 있다. 부정선거론으로 극우 표를 얻은 김문수 후보는 돌연 사전투표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독려도 했다. “사전투표 안 했다가 본 투표도 못 하면 큰 일”이라는 이유다. 음모론 세력의 환심도, 공정한 선거제도의 열매도 갖겠다는 식이다.

지난 미국 대선 트럼프와 겨뤘던 카멀라 해리스는 “선거에서 패배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라고 했다. 선거가 조작됐다는 착각이 부른 21세기 계엄령, 그리고 탄핵의 결과물이 이번 대선 아닌가. 모른 척 넘어가기엔 6·3 대선의 의미가 너무 무겁다. 비극의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