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청산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니 뭐 어떡해, 산업은행이 계속 떠안았지.”
최근 만난 전직 금융 당국 관계자로부터 흥미로운 비화를 들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금융 당국 고위직을 맡았던 그는 2020년쯤 KDB생명 매수자를 찾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당국이 접촉한 사업자들은 모두 난색을 보였다. 국내 생명보험 시장은 정체됐는데, 거액을 들여 사업성이 망가진 보험사를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 내에서는 KDB생명의 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산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던 중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청산은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매각이 어렵다면 산은의 자회사 편입을 고려하라는 각주가 달렸다. 사실상 지시다.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이 연달아 예정된 때다. “선거 앞두고 금융시장에 괜한 불안을 심지 말라는 게 BH(Blue House·청와대) 의중인 것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산은은 올해 3월 KDB생명 자회사 편입을 마무리했다. 부채만 17조원에 달하는 이 보험사를 살리기 위해 산은은 증자를 검토 중이다. 이미 1조5000억원을 투입했는데도 말이다.
산은의 70년 역사는 곧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산업화 발자취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산은은 총대를 메고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며 우리 경제 버팀목 노릇을 해냈다. 지금도 산은은 글로벌 무역 위기 속 자동차·반도체 사업 등을 지원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은을 두고 ‘정권 입맛에 따라 설거지하고 있다’는 비아냥이 들린다. 정책금융기관이 정권의 표심 지키기 용도로 휘둘린다는 지적이다.
2015년 산은은 대우조선해양 정상화를 명목으로 2조6000억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단행했다. 당시 국내 조선업은 위기를 맞았고, 이는 박근혜 정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산은의 공적 자금 투입을 결정한 곳은 청와대 서별관 회의. 청와대 서별관 회의는 거시경제 관련 비공개 협의회다. 정부 재정 2조6000억원이 투입되는 정책이 커튼 뒤에서 뚝딱 이뤄졌다.
산은은 정책금융기관인 동시에 투자은행(IB) 성격을 띤다. 공공의 후생을 위해 돈을 투입하지만, 자금 회수 가능성과 장기적인 산업 회생 가능성도 함께 따져야 한다. 정부의 의지와 금융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견해, 공공의 의사가 같이 논의돼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정부는 피곤한 토론보다 산은을 활용한 빠른 자금 투입을 선호했다. 산은이 정책 선전용으로 쓰이는 동안 재정 건전성은 나빠졌다. 지난해 말 산은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13.9%로 금융 당국의 권고치(13%)를 겨우 맞춘다. 산은의 자본을 확충하자니 또다시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
산은의 존재 목적상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을 일부 떠안는 것은 불가피하다. 다만 숙고와 위험 회피 방안이 전제로 따라야 한다. 핵심은 독립성 확보와 지배 구조 혁신이다. 이사회 별도로 자금 운용 결정에 관여하는 위원회를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공공 출신과 민간 전문가를 모두 받아들여 이사회의 일방적인 자금 집행을 견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차기 정권의 의지다. 산은의 지배 구조를 개편하고 독립성을 쥐여줄 수 있는 주체는 차기 정권이다. 다음 정부는 지속 가능한 정책 금융을 고민해야 한다. 책임 없이 돈을 퍼붓는 것은 정책금융기관의 마땅한 기능이 아니다. 장기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