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80시간도 부족했죠.”
얼마 전 만난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엔지니어는 시스템LSI 사업부가 설계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엑시노스 2500’ 프로젝트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메워가며 일을 했냐는 질문에는 ‘주 52시간제’를 의식한 듯 말끝을 흐렸다.
올해 초 삼성전자 MX(모바일)사업부가 출시한 갤럭시S25 시리즈에 설계 결함과 저조한 수율 등의 이유로 엑시노스 2500 탑재가 불발되면서 시스템LSI 사업부와 파운드리 사업부는 ‘초비상’이 걸렸다. 주력 사업이 좌초되면서 두 사업부는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됐고, 실적 부진의 주범이 됐다. 삼성 반도체의 사업 경쟁력을 저하시켰다는 질타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이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엑시노스 2500을 삼성전자의 플래그십 폴더플 폰' 플립7′에 탑재시키는 데 성공했다. 엑시노스 2500을 양산하는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수율도 안정화됐다. AP에 적용되는 핵심 설계자산(IP)과 성능 등이 검증돼 엑시노스 2600 등 차세대 모델 공급을 앞두고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TSMC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격차가 벌어지는 가운데, 첨단 공정 수율이 안정화되면서 추격의 불씨를 되살렸다.
문제는 삼성전자를 둘러싼 대외적인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며, 자국 우선주의가 심화되는 등 국제 정세의 혼란이 겉잡을 수 없게 됐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TSMC는 미국에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밀착하고 있다. 대만 정부 협상팀도 관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물밑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만년 3위로 평가되던 미국 마이크론도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자국 기업과 협업을 강화하며 삼성전자를 뒤쫓고 있다. 턱밑에서 추격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은 정부 지원금과 막강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격차를 좁히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들과 달리 우리 기업들은 정반대의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와 그를 대행하는 경제부총리마저 일선에서 물러나며 리더십 공백이 벌어지고 있다.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 후보와 그가 속한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반도체 특별법의 핵심인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은 외면했다.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 단일화를 두고 내홍을 겪으며 산업 정책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산업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엔지니어들은 ‘주 80시간도 부족하다’며 사활을 걸고 있지만, 정치권은 이권 다툼에만 매몰돼 있다.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해 세계 각국이 투자와 제도적인 지원책 마련에 고삐를 죄고 있다. 우리 정치권도 초당적 협의를 통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주지는 못할 망정, 더 이상 산업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