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직(職)을 건 사퇴 소동이 한 달도 안 돼 없던 일로 끝나는 분위기다. 정부의 상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에 반대해 직을 걸겠다고 했던 이 원장은 오는 6월 6일까지 임기를 완주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한바탕 큰 소란을 벌인 이 원장은 주변의 만류와 불안정한 시장 상황을 사퇴 ‘보류’의 이유로 들었다. 명분에 일리는 있었으나, 궁색했다. 탄핵 심판 선고 이틀 전 “임명권자인 대통령께 (거취 결정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현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을 언급한 것도 뜬금없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직을 걸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으면 사의 반려할 걸 기대하지 말고 짐 싸서 청사를 떠나는 게 공인의 올바른 태도다”라고 지적했다.

이 원장의 ‘직을 건다’는 발언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각오로 임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수사(修辭)였다고 한다. 사석에서 만난 한 금감원 관계자는 “임기를 2개월여 앞두고 사퇴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며 “애초 이 원장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원장에겐 단순 강조의 의미”라고 했다. 이 원장은 2023년 5월에도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과 대규모 주가조작 사태와 관련해 “직을 걸고 작전 세력과 전쟁을 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애초 임명직 공직자의 진퇴는 스스로 정할 문제가 아니다. 금감원장은 금융위원장이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다. 임명직 공직자는 정부가 부여한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도리다. 선출직 정치인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생명을 걸고 ‘대선 불출마’ ‘사퇴’ 등의 배수의 진을 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임명직 공직자가 직을 거는 것은 허세 부리기 또는 여론 호도용에 불과하다.

2022년 10월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윤 대통령과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야당 의원에게 “제가 거기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저는 직을 포함해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거시겠냐”고 해 정치권이 떠들썩했다. 무리한 의혹 제기 등이 문제긴 했지만, 법무부 장관이 흡사 정치인 화법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한 전 장관은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다. 한 전 장관과 함께 ‘윤석열 사단’으로 불리는 이 원장의 돌발 발언 역시 정치권에 발을 들이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은 거듭 제기되고 있다. 이 원장은 여러 차례 정치권엔 뜻이 없다고 공언해 왔다. 최근엔 라디오 인터뷰에서 “퇴임하면 민간에서 시야를 넓히는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번복’을 거듭하는 이 원장의 말을 오롯이 믿는 이들이 많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가 어느 자리를 탐낸다는 류의 설(說)이 돌고 있다.

이 원장은 지난 9일에도 상법 개정을 또다시 언급하며 국회의 재의결 지연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을 겨냥해 “헌법재판관 임명 지연을 반헌법적이라고 비난해 놓고 헌법이 명확히 정한 재의 절차를 미루는 것은 내로남불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 거취에 대한 질문엔 “상법 재의결 절차와 관련한 입장으로 갈음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직을 걸겠다는 말을 무른 이 원장이 퇴직 후 민간에서 일하겠다는 결정은 번복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