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내 주요 조선사 전문가들이 극지연구소에 모였다.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 사업 입찰을 앞두고 마련된 공개 설명회 자리였다. 질의응답이 끊이지 않아 설명회는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겨서 끝났다. 남극과 북극의 얼어붙은 바다를 누비며 항해하는 연구선을 만드는 일에 쏟아진 관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업 예산은 지난 1분기 국내 조선 3사 평균 수주액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지만,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태극기를 달고 극지를 항해할 쇄빙연구선 만드는 일의 매력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차세대 쇄빙연구선 사업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부 예산 투입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세 번 만에 통과했고, 예산 확보 후에도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 등의 영향으로 두 차례 입찰이 유찰됐다.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기 위해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총사업비를 증액했고, 세 번째 입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최근 설명회 분위기만 보더라도, 이번에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북극의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 합병을 거론하고, 그의 아들이 실제로 그린란드를 방문한 일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은 신규 쇄빙연구선의 진수를 마쳤고, 내년 말 인도를 앞두고 있다. 얼음으로 막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극은, ‘아는 만큼 힘이 되는 곳이 됐다. 우리나라는 국내 유일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연구 활동을 수행 중이지만, 실제 북극 연구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일 년에 두 달 남짓이다.
극지는 정확한 시점보다 축적된 시간이 힘을 발휘하는 곳이다. 변화무쌍하고 고립된 극지에서 최적의 투자나 활동 시점을 예측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꾸준한 연구와 관측의 지속성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기회를 만들긴 어려워도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극지에서 배운 노하우이다.
최근 극지연구소는 대서양이 북극해에 미치는 영향력을 수천㎞ 떨어진, 반대편 태평양 입구에서 확인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15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여름마다 아라온호가 북극에서 모았던 기록 덕분이다. 오징어와 대게의 북극해 출현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몇 년 전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축적된 시간의 힘이다.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아라온호보다 두 배 무거운 배가 될 예정이다. 무거울수록 더 두꺼운 얼음을 부수며 항해할 수 있어서,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아라온호가 가지 못했던 북극 더 깊은 곳까지 다가갈 것으로 예상한다. 여름철 잠깐 들르는 지금과 달리 북극 전용으로 설계돼 긴 시간 머무르며 북극해의 봄과 가을의 변화도 살필 수 있다. 기후변화에서 비롯된 더 많은 기회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가 굳이 멀리 떨어진 북극을 연구해야 할까. 겉보기에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지 않아 보이지만, 이런 질문에 답하는 일은 과학자에게 오랜 숙명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북극발’로 시작되는 한파나 폭염 같은 이상기상 현상이 계속되길 바라는 못난 마음을 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아라온호와 함께한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차세대 쇄빙연구선이 쌓아갈 시간이 이 의문을 해소해 줄 것이라 믿는다.
북극은 대부분 다른 나라의 영역이지만, 그 바다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드문 통로이자 협력의 공간이다. 쇄빙연구선은 북극 바다에서 과학과 외교의 길을 열어주는 특별한 선박이다. 마침 이달 말은 서른 번째 바다의 날이다. 대한민국이 지구 바다 곳곳에서 쌓아온 노력을 되새기며, 바다의 가장 끄트머리 북극에서 다시 각오를 다진다. 다음 쇄빙연구선을 기다리며, 올여름 우리는 다시 북극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