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이렇게 숫자에 매몰된 적이 있었을까 싶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의료대란은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아 버린 데에 기인하는데, 이 세상에 논의의 대상이 아닌 일은 없다. 불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에서도 모든 법칙은 논의 대상이다. 하물며 우리나라에 부족한 의사 수가 몇 명일지, 부족한 숫자를 채운다면 어떻게 채우는 것이 좋을 지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건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누가 봐도 정부가 이런 무리한 진행을 하는 건 ‘여론’이 정부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수 국민이 필수의료에 부족한 ‘의사 증원’을 지지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이 지지한 건 ‘의사 증원’이지 당장 내년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는 건 아니었고 의료계가 막으려 한 것도 증원 자체가 아니라 당장 2000명을 증원하는 거였다.

막상 국민들도 2000명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정부의 주장은 10년 후 최소 1만명이 부족하다고 한 의료수요 예측 보고서를 근거로 단시간 내에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는 당장 2000명이 최소한의 증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의 저자들조차 제한된 조건에서의 추계로 이를 바탕으로 증원 규모를 도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1만 명을 채우는 방법이 ‘2000 곱하기 5′ 하나일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2000명 증원’을 고수하겠다면 1만 명이 충원되는 5년 후에는 원래 정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단 배정한 정원을 갑자기 줄이는 쪽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시적 증원임을 확실히 하지 않는다면 의사 수를 한없이 늘리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으니 의료계 뿐 아니라 국민들도 장기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감축계획을 명확히 밝혀 의대 증원을 소멸해가는 지방대학을 살리는 카드로 여기거나 학원가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준비반이 성업하는 기현상을 막아야 한다.

의대 정원의 논의에서 간과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 진행될 국가 인적자원 감소 문제다. 저출산이 현재 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학정원 확대에 대한 논의에서 대학 지원자 수의 변화에 대한 고려가 없는 걸 보면 급격한 출생아 감소가 대략 19년의 시차를 두고 급격한 대학지원자 감소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출생아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대략 2012년부터 시작됐다. 2012년 48만명에서 2023년 23만명이 되었으니 이는 2031년부터 인적 자원의 공급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10년이면 절반이 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저출산 정책이 성공해 당장 내년부터 출생아가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변치 않을 일이다. 곧 모든 분야에서 인원을 감축해야 할 것이며, 급격히 감소하는 인적 자원을 각 분야에 어떻게 배분해야 우리나라의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것인지가 정치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시기를 눈앞에 두고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 초래할 미래 인력 불균형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우수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으로 필수 분야의 인재 부족이 우려되고 있는 바, 의대 정원 확대가 보건복지부에서 의사의 수요만을 따져 정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동안 대부분의 수련의들이 사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났다. 이들이 떠난 병원을 지키려 거의 사투를 벌이던 교수들도 사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날 것을 예고했다. 사표를 제출한 의사들은 의료의 미래를 끌고 나갈 젊은 수련의들과 현재 수준 높은 의료 수준을 떠받치고 있는 대학 병원의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의 영향으로 한국의 의료가 얼마나 후퇴할지 생각하면 두렵다. 정부가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이들의 행동을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 의사들의 실력행사라고 비난하며 국민과 의사를 분열시키며 생긴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더욱 두렵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권에서 중재에 나섰다고 해서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정작 중요한 의대 정원 문제는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뉴스를 보니 의사들이 자긍심을 갖고 환자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해결책을 제시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현재 의료대란의 책임이 정부에 있는지 환자 곁을 떠난 의사에게 있는지를 따지고 있어서 당장 국민이 입는 피해가 너무 크다. 정부는 병원 갈 일 생길까 불안에 떠는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2000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후퇴하면 의사 증원 자체가 무산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인력 양성이라는 큰 틀에서 의대 정원 문제를 다시 논의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의료대란에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호원경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