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은 지난 2021년 11월 취임 당시 자사가 지향해야 할 3대 경영 키워드로 ‘고객·기술·서비스’를 제시했다. 모든 서비스의 시작과 끝은 고객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차별화된 기술로 고객 만족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좋은 서비스를 고객에게 직접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난달 유심(USIM·가입자식별장치) 정보 해킹 사고 이후 SK텔레콤 앞에 고객·기술·서비스는 찾아볼 수가 없다. 회사의 귀책사유는 인정하면서도 가입자들의 위약금 면제는 못 해주겠다고 버티며, 통신 3사 중 유일하게 유심 인증키를 암호화하지 않은 허점을 노출했다. 지난달 말 SK텔레콤 가입자들은 유심을 교체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대리점 앞에 줄을 서고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해킹 사고 소식을 최초에 접한 2500만(알뜰폰 포함) SK텔레콤 가입자들은 ‘어떤 정보가 해커들의 손에 넘어간 것일까’라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유심을 무료로 교체해주겠다”는 회사 측의 약속과 달리 물량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SK텔레콤 고객들은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왜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냐”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해킹 사고 이후 30만명에 가까운 SK텔레콤 가입자들이 KT와 LG유플러스로 갈아탔다.
어느 기업이나 예상치 못한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위기의 강도와 빈도는 디지털 시대, 특히 인공지능(AI)이 확산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지고 잦아졌다. 문제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하느냐이다. 그런 측면에서 SK텔레콤의 해킹 사고 대응은 수습이 아니라 더 큰 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정부·국회 등이 개입하면서 전 국민적인 이슈로 번졌다.
지난 1989년 미국 알래스카주 프린스 윌리엄만에서 발생한 엑슨 발데즈 기름 유출 사건은 최악의 위기 대응 사례로 꼽힌다. 당시 로렌스 롤 엑슨 최고경영자(CEO)는 기름 유출이 심각하지 않으며 훨씬 더 심각한 기름 유출도 말끔히 치운 적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는 프린스 윌리엄만의 조류가 어떤 연안 지역 조류보다 강하며, 엑슨이 사용했던 분산제가 기름띠 제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여기에 원유 유출 책임을 발데즈호 선장 탓으로 돌렸고, 기름띠 제거 관련 정책 결정을 신속하게 하지 않은 알래스카주를 비난했다. 결과는 해상에서 발생한 환경 파괴 중 최악의 사건이 됐다.
위기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신속하고 투명하며 정직하게 이뤄져야 한다. 기업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소비자들의 불만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SK텔레콤은 해킹 사고가 난 뒤 나흘이 지난 뒤에야 언론에 알렸고, 피해 규모도 회사 측이 직접 밝힌 게 아니라 의원실을 통해 알려졌다. 유영상 사장의 대국민 사과 시점은 늦었으며, 충분한 사후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5월로 넘어와도 상황이 진정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급기야 SK그룹 총수인 최태원 회장이 나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SK텔레콤은 정부와 국회에 끌려다니며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부가 내릴 수 있는 행정명령의 최대 수위가 3개월 영업정지인데, 만약 현실화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고객들을 잃을지 예측 불허다. 잃어버린 고객들은 훗날 되찾아 올 수 있지만, 무너진 기업 명성과 구성원들의 사기는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렵다. 유영상 사장이 취임 시 제시했던 3대 경영 키워드 중 하나라도 신경을 썼다면 지금처럼 SK텔레콤 가입자들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