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3월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과 ‘AI와 대한민국,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다./더불어민주당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실 초대 AI미래기획수석으로 하정우 전 네이버클라우드 센터장을 임명한 건 국가 차원에서 ‘소버린(Sovereign·주권) 인공지능(AI)’ 개발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AI 투자 100조원’ 시대 개막을 내걸었는데, 이 비전을 실현할 참모로 하 수석을 낙점한 것이다.

학계와 IT업계에선 민간 전문가를 국가 AI 전략 수립의 컨트롤타워로 발탁한 점에 기대를 나타내면서도 ‘소버린 AI’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미 글로벌 빅테크와 기술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인데, 범국민 AI 서비스 개발에 자원을 집중한다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일 IT업계에 따르면 하 수석은 그간 여러 자리에서 한정된 국가 자원을 ‘소버린 AI’ 개발을 주도할 수 있는 기업·기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해 왔다. 소버린 AI는 국가나 기업이 자체적인 인프라·데이터를 활용해 독립적인 AI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한글 사용성이 높고 한국 문화·제도·특성에 맞는 자체 AI 서비스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국내 AI 시장이 글로벌 빅테크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는 전략이다. 이 대통령은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통해 생성형 AI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AI 기본 사회 구축을 구상하고 있다.

◇ 韓 자체 AI 모델 14개, 글로벌 톱 50위엔 ‘0’

국내에서 소버린 AI라고 부를 수 있는 모델은 14개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부설 기관인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의 ‘글로벌 초거대 AI 모델 현황 분석’에 따르면 작년 기준 한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자체 AI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10개)보다는 많지만, 미국(125개)과 중국(95개)과 비교해 격차가 크다. 2020년부터 작년까지 세계에 출시된 AI 모델은 271개로 조사됐는데, 미국·중국이 81.2%를 차지하고 있다.

14개 AI 모델은 6곳의 기업이 만들었다. LG그룹이 5개, 네이버와 삼성이 각각 3개씩 AI 모델을 자체 개발해 사내 업무 효율성을 높이거나 기업간거래(B2B) 솔루션에 사용하고 있다. KT·엔씨소프트·코난테크놀로지도 각 1개씩 자체 AI 모델을 운영 중이다. IT업계 관계자는 “하 수석이 그간 강조한 ‘AI 경쟁력 강화’ 방향성을 보면 자체 모델을 개발한 기업을 중심으로 국가 지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들 모델이 경쟁력 있는 일반 소비자(B2C) AI 서비스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벤처캐피탈(VC)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가 지난 3월 발표한 ‘세계 AI 서비스 사용량 톱 50′ 중 한국의 자체 모델 기반 서비스는 단 하나도 포함되지 못했다.

웹 기반 AI 서비스 톱 50에는 SK텔레콤 에이닷(A.)이 15위, 라이너가 19위에 이름을 올렸다. 두 기업은 LG·삼성·네이버와 같은 자체 거대 AI를 하지는 않지만, 소형 자체 모델을 기반으로 최적화된 특화 서비스를 구축했다. SK텔레콤은 퍼플렉시티 등과, 라이너는 오픈AI·구글 등과 폭넓은 협력 관계를 구축해 AI 서비스 편의성을 높여 사용자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가 지난 3월 발표한 ‘세계 웹 기반 AI 서비스 사용량 톱 50’ 목록./a16z 제공

◇ “범국민적 AI 서비스보단 ‘특화 영역’서 기회 발굴해야”

전문가들은 한국형 ‘소버린 AI’ 개발 정책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AI비즈니스전공 교수는 “우리 기업·기관이 만든 AI를 정부가 국민에게 보급한다는 목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챗GPT·퍼플렉시티 등은 일상은 물론 업무 영역에서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AI 서비스로 자리를 잡은 상태다. 우리나라와 글로벌 기업 간 기술 격차가 이미 상당히 벌어진 상황에서 자체 기술로 만든 범국민적 AI 서비스를 고집한다면 되레 ‘AI를 통한 산업 성장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다만 “전략적 자원 측면에서 소버린 AI를 접근하는 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외국 AI 모델에 의지하면 안 되는 국방·안보 등의 분야에서 소버린 AI를 구축하는 걸 목표로 정부 자원이 우선 투입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윤석빈 서강대 AI·SW대학원 특임교수도 “한국 특화 AI 모델은 범용적인 서비스보다 현재 강점이 있는 제조·문화 산업에 먼저 지원이 이뤄져 시너지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0조원을 투입한다고 해서 단숨에 챗GPT와 같은 AI 서비스가 나오는 게 아니다”라면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는 분야에서 ‘소버린 AI’를 구축해야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윤혜영 한국정보공학기술사회 AI정책추진단장은 “범국민 AI 서비스든, 공공·금융·안보 특화 AI든, 어떤 형태 서비스라도 ‘한국 특성’에 맞는 데이터를 확보하는 게 우선돼야 사용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