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등의 불확실성으로 반도체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위축된 가운데 동남아 지역이 ‘포스트 트럼프’ 시대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 생산 공장의 특성상 투자를 시작한 뒤 3~4년이 지나서야 본격 가동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를 대비해 동남아를 중심으로 공급망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3일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 지역은 저렴한 인건비, 지리적 위치, 정부의 지원 정책 등을 강점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조립·테스트·패키징(ATP) 분야를 중심으로 빠르게 존재감을 키우고 있으며, 정부 주도 유치 전략, 세제 혜택, 낮은 생산 비용 등을 무기로 반도체 투자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미 인텔, 브로드컴, 마이크론 등이 진출한 말레이시아는 아시아 지역의 글로벌 공급망 허브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반도체 후공정의 13%를 차지하는 반도체 공급망 허브 중 하나다. 인텔, 인피니언 등 글로벌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며, 말레이시아 정부는 올해까지 1000억달러(약 136조원) 이상의 투자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인텔은 말레이시아에 오랜 기간 후공정, 조립 라인을 구축해왔으며 추가 투자를 단행해 첨단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을 설립 중이다. 마이크론도 페낭에 두 번째 조립·테스트 공장을 신설했으며,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도 말레이시아에 31억달러(약 4조원)를 투자해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자동차 반도체 시장 강자인 인피니언은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반도체 제조·패키지 공장을 페낭에 설립하고 있으며, 브로드컴도 현지 기업 이나리를 통해 패키징 및 부품 제조를 진행 중이다.
반도체 설계 디자인 뿐만 아니라 직접 제조를 선언한 ARM도 첫 생산 거점으로 말레이시아를 낙점했다. 지난 3월 말레이시아 정부는 ARM에 10년간 2억5000만달러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자체 반도체 생산을 위한 반도체 설계 지식재산권(IP)을 제공받기로 했다. 모하마드 라피지 람리 총리실 경제장관은 “우리는 말레이시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테스트 등 후공정에서 전공정으로 옮겨가기를 원했다”며 “이를 위해 ARM과 협력하는 급진적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도 반도체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6%를 차지하며, 글로벌 반도체 장비 생산의 20%를 담당하고 있기. 마이크론은 싱가포르 공장에서 최첨단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을 위해 설비 교체를 진행 중이며, 글로벌파운드리 역시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있다. 여기에 TSMC 계열사 뱅가드(VIS)와 NXP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 합작 법인을 세우고 78억달러(약 10조7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웨이퍼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싱가포르 정부 차원에서도 R&D 및 인재 육성을 위해 136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베트남은 반도체 조립, 테스트 부문 신흥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 규모가 지난 2016년 106억2000만달러에서 2023년 150억1000만달러로 41% 증가했다. 후공정 분야 강자인 엠코가 공장을 운영 중이며 반도체 수출 100억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베트남 역시 인재 양성에 정부 차원의 투자가 진행 중인데, 약 5만명의 반도체 엔지니어 양성을 위해 10억달러 규모의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설비투자는 긴 호흡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트럼프 관세에 대비해 생산지를 옮기거나 새로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면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지속될 것이기에 인건비가 낮고, 인력, 생태계가 조성돼 있는 동남아 국가들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가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