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지난 9일(현지시각) 개막한 연례 세계개발자회의(WWDC25)에서 ‘인공지능(AI) 혁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난 2011년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 타계 후 회사를 이끌고 있는 팀 쿡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시장 개척 등의 성과를 냈지만, 자율주행(애플카)·메타버스(비전 프로) 등에 집중하면서 AI 서비스 대응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애플이 그간 유지해 왔던 ‘폐쇄형 운영’ 기조를 깨고 오픈AI와 협력하는 등 개방형 전략을 도입하는 것이 AI 기술 부재에 따른 변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AI 시대 대응 못 하면 노키아처럼 될 것”
애플이 WWDC25에서 신규 AI라고 소개한 기능 대다수는 삼성전자가 작년 갤럭시S24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선보인 것과 동일하다. 애플은 온디바이스 AI(서버 연결 없이 기기 자체적으로 AI 기능을 수행하는 기술)를 통해 실시간 번역을 제공하고, 화면에 나타난 사물을 인식해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점을 강조했다. 생성형 AI와 음성인식 비서를 결합해 사용성을 끌어올린 ‘시리 2.0’ 버전의 출시에 대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작년 초 갤럭시 AI를 출시하면서 온디바이스 AI 기반 번역 기능을 구현했고, 구글과의 협력을 통해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바로 찾을 수 있는 기능도 선보였다. 애플이 이번에 공개한 AI 신기능은 연말부터 적용된다. 갤럭시 AI와 2년 정도의 격차가 나는 셈이다.
IT업계 관계자는 “2007년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연 애플은 ‘퍼스트 무버’로 불려 왔지만 AI 시대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경쟁력을 잃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갤럭시 AI를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어로 전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애플은 AI 대신 사용자환경(UI)인 ‘리퀴드 글래스’를 공개하며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했다. 알림창·아이콘·검색창 등을 반투명하게 만들어 창을 열고도 배경화면이 흐릿하게 보이도록 바뀐다. 제시카 칼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이에 대해 “팀 쿡 CEO는 올해 들어 19% 정도의 주가 하락을 마주하고 있다”며 “투명한 앱이 회사를 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평가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도 이번 행사 직후 ‘팀 쿡은 애플이 노키아처럼 되는 걸 막을 수 있을까’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는 애플이 스마트폰을 출시한 후 시장 대응에 실패하며 빠르게 몰락했다. 애플의 AI 기술 부재가 회사를 무너뜨릴 요인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1년 전 애플이 ‘애플 인텔리전스’로 불리는 AI 전략을 공개했을 때 주가가 치솟았다. 생성형 AI를 통해 애플이 아이폰을 디지털 비서로 변화시켜 침체한 스마트폰 판매를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12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이런 기대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 애플카·메타버스에 발목 잡힌 애플 AI, 오픈AI·구글과 맞손
애플이 AI 시장 대응에 늦어진 배경으로는 팀 쿡 CEO가 추진했던 애플카 프로젝트가 꼽힌다. 애플은 지난 2014년 ‘애플카’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10년간 수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약 100억달러(13조4800억원)를 투자했다. 그러나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고 프로젝트를 작년 초 전면 폐기했다. 뒤처진 AI 기술을 따라가기 위해 경영 리소스(자원)를 집중하겠단 취지였다.
‘팀 쿡의 야심작’이라고 불린 비전 프로 역시 투자에 비해 거둬들인 성과가 적다. 애플은 지난 2015년 독일 증강현실(AR) 기업 메타이오와 2017년 캐나다 AR 헤드셋 스타트업 버바나를 인수했다. 2016년부터 기술개발그룹(TDG) 조직에 최소 1000명의 임직원을 배치해 메타버스 기기 기술 개발을 진행했다.
2023년 6월 WWDC에서 공간컴퓨팅 기기라고 이름을 붙인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 프로’를 공개하며 이목을 사로잡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작년 1분기부터 2분기까지 비전 프로의 미국 내 판매량은 17만대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초 30만∼40만대가 팔릴 것이라던 기대를 크게 밑돈 성적이다.
팀 쿡 CEO가 두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자체 AI 기술 개발에는 다소 소홀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오랜 시간 경쟁사 대비 적은 AI 개발 인력을 뒀고, 대형언어모델(LLM) 학습에 필요한 고가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도 미진한 상태다.
팀 쿡 CEO는 이에 ‘폐쇄 운영 기조 탈피’를 AI 기술 부재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제시한 모양새다. 작년 WWDC에서 자체 AI ‘애플 인텔리전스’와 오픈AI와의 협력을 발표한 바 있다. 올해 행사에서 이미지 생성 도구 ‘이미지 플레이그라운드’와 ‘챗GPT’ 결합을 통한 일부 성능 개선을 발표했지만, 아직 전방위적인 협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플의 사파리 브라우저에 퍼플렉시티·오픈AI·앤트로픽 등의 AI 검색 기능을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스마트폰 운영체제(OS)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구글과도 AI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팀 쿡 CEO가 지난 3월 중국을 방문해 딥시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점을 들어 이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이에 대해 “애플은 첨단 AI가 없어도 10억개가 넘는 기기를 사람들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유통망이 있어 미래 전망이 나쁘지만은 않다”면서도 “몇 년 안으로 사업의 최소 요건(Table Stakes)이 될 핵심 기술을 다른 곳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