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에현 요카이치에 있는 키옥시아 제조공장(팹7)./키옥시아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낸드플래시 강자인 일본 키옥시아가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중심으로 AI 메모리 기술 경쟁을 이끌어가는 사이, 한발 뒤에 있던 키옥시아는 ‘AI 추론’에 특화된 전략을 공개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키옥시아는 최근 글로벌 애널리스트 대상 기업설명회에서 AI의 활용 단계인 ‘추론’ 시장에 전력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AI 추론용 스토리지를 앞세워 하드웨어 기술부터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전략으로 시장 주도권을 잡겠다는 포부다.

AI 모델을 만드는 ‘학습’이 거대한 도서관의 모든 책을 한 번에 서가에 옮기는 작업이라면, 실제 서비스인 ‘추론’은 수만 명의 독자가 동시에 서로 다른 페이지를 즉시 찾아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에 가깝다. 이 때문에 추론 시장에서는 HBM의 연산 지원 능력과 더불어 빠르고 순발력 있는 고성능 스토리지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키옥시아는 추론용 스토리지 시장이 오는 2029년까지 연평균 69%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전체 낸드 시장 성장률 전망치(20%)를 3배 이상 웃도는 수치다.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4위인 키옥시아가 추론 시장에 집중하는 건 레드오션인 기존 낸드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글로벌 상위 5개 낸드플래시 제조사의 매출은 120억2000만달러(약 16조3000억원)로 전 분기 대비 24% 급락했다. 경쟁 심화와 수요 감소로 업계 평균 낸드 판매가는 지난 분기보다 15% 하락했고 출하량도 7% 줄었다. 이에 키옥시아는 전면전 대신 기술 차별화를 통한 영토 개척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키옥시아가 내세운 전략의 핵심은 부품 공급을 넘어, 구체적인 AI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있다. 소프트웨어 ‘AiSAQ’는 AI의 답변 정확도를 높이는 검색 증강 생성(RAG) 기술의 비용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RAG 시스템은 속도 때문에 고가의 D램에 의존하지만, AiSAQ는 대용량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활용해도 고속 검색이 가능하다.

AI 연산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그래픽처리장치(GPU) 데이터 병목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카드로 ‘슈퍼 하이 IOPS SSD’도 소개했다. AI 두뇌 역할을 하는 GPU가 가장 필요로 하는 데이터를 지연 없이 즉시 공급하는 저장 장치로, 1000만 IOPS(초당 입출력 횟수) 이상을 목표로 한다. 이는 현재 최고 성능의 데이터센터용 SSD보다도 3~5배 빠른 속도로, 내년 하반기 샘플 출시를 계획 중이다. 요코츠카 마사시 키옥시아 부사장은 “세계 최대 GPU 제조사와 협력해 GPU 시스템에서 더 나은 성능을 구현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키옥시아는 차세대 D램인 ‘OCTRAM’을 개발 중이라고 밝히며, 장기적으로 저전력 메모리 시장까지 넘보겠다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낸드플래시 시장 경쟁은 AI 시대를 맞아 단순히 가격과 용량, 범용 성능을 넘어서고 있다”며 “키옥시아는 이에 맞는 다층적인 포트폴리오를 내세운 셈인데, 결국 이 모든 기술을 하나의 솔루션으로 묶어 시스템 전체의 가치를 시장에 증명하고 고객을 설득하는 과정이 향후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