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스피드의 실리콘카바이드 200㎜ 웨이퍼(반도체 원판)./울프스피드 제공

미국의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반도체 기업인 울프스피드가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파산 신청을 준비하면서 글로벌 전력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울프스피드는 이달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앞으로 회사가 사업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그 능력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자체적으로 경영난을 극복하기엔 어려운 상황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1987년 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설립된 울프스피드는 기존 실리콘(Si)보다 고열·고전압 환경에 강한 SiC를 활용해 웨이퍼(반도체 기판)를 만든 시장 선두 업체다. SiC 웨이퍼는 에너지 효율이 중요한 전기차용 전력반도체를 비롯해 신재생에너지 등의 핵심 소재로 쓰인다.

전력반도체의 핵심 공급망을 담당하던 울프스피드가 몰락한 배경 중 하나는 중국 제조업체와의 경쟁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SiC 소재와 웨이퍼 국산화를 목표로 기술 개발과 생산 라인 투자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중국 SiC 제조사들은 낮은 가격과 빠른 납기를 앞세워 기존 강자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세계 1위 전력반도체 기업인 독일 인피니언 등에 SiC 웨이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울프스피드가 선도하던 기술 격차가 전보다 줄어들면서 수익성이 악화했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가 이어지면서 울프스피드 사업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전기차가 예상보다 안 팔리자 올 상반기 자동차 제조사들이 고전압 전기차 시스템 전환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차세대 부품 조달을 미루는 추세다. 주문이 줄자 그간 차세대 200㎜(8인치) SiC 웨이퍼 생산 능력 확충과 고전압용 제품 개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왔던 울프스피드의 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울프스피드는 바이든 행정부 때 약속받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보조금 약 7억5000만달러(약 1조원)를 마지막 동아줄로 여겨왔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이마저도 지급이 불투명해지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울프스피드가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주문을 넣었던 글로벌 전력 반도체 회사들의 사업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일본 전력반도체 회사인 르네사스는 2년 전 울프스피드와 10년간 SiC 웨이퍼를 공급받기로 계약하고 20억달러(약 2조7000억원)를 선지급했다. 닛케이는 울프스피드가 파산 절차를 밟을 경우 르네사스가 선급금을 회수하기가 어렵게 되면서 막대한 회계상 손실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SiC 웨이퍼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글로벌 전력 반도체 기업들은 대체 공급처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울프스피드가 담당하던 일부 주문은 이미 대체 공급사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며 “올해를 기점으로 다수 기업이 8인치 SiC 웨이퍼 시장에 새로 진입하거나 생산량을 확대할 예정인 만큼,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SK실트론, 온세미를 비롯한 여러 글로벌 기업들은 올해부터 8인치 SiC 웨이퍼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울프스피드의 위기가 중국 SiC 산업엔 도약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울프스피드가 파산 혹은 사업 매각 절차를 밟게 될 경우, 회사가 보유한 핵심 특허나 SiC 제조 기술, 연구개발(R&D) 인력이 시장에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중국 기업 입장에선 그야말로 기술적 ‘퀀텀 점프’를 이룰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만에 하나 이들이 울프스피드의 핵심 자산을 인수하게 된다면 단숨에 선두 그룹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 글로벌 SiC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한층 강화하는 결정적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