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휴대폰 매장./연합뉴스

국내 통신사 위약금 제도가 해외와 비교해 소비자 권익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위약금 규모는 가입 기간이 늘어날수록 줄어들기 마련인데, 국내 통신사는 가입 기간 중 위약금이 증가하는 구간을 넣어 경쟁을 통한 혜택 제공을 제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일본은 약 1만원으로 위약금 부담이 작아 자유롭게 통신사를 옮길 수 있다. 미국 역시 가입 기간별로 위약금이 계단식으로 점차 낮아진다. 반면 우리나라는 ‘할인 반환금’ 형태의 위약금 제도가 운영되면서 월 요금의 최대 2.66배를 부담해야 통신사 변경이 가능하다.

◇ 韓 위약금 제도, 약정 기간 절반 동안 ‘증가’

22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SK텔레콤·KT·LG유플러스는 요금제를 크게 ‘선택 약정’과 ‘기기 지원금’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단말 공시지원금을 받는 제도의 약정 기간은 2년이고, 서비스 요금에 25%를 할인받는 제도는 1년과 2년 중 선택할 수 있다.

가입 요금제에 따라 위약금도 달라진다. 지원금 요금제의 경우 6개월 내 해지 시 할인받은 기기 가격 모두를 반환해야 한다. 6개월 이후로는 위약금이 비례적으로 감소해 계약 종료 시 0원이 되는 구조다.

선택 약정 요금제의 경우 계약 기간 4분의 1 내 해지가 이뤄지면 할인받은 금액 모두를 반환해야 한다. 1년 약정은 3개월, 2년 약정은 6개월이 ‘약정 할인 금액 모두 반환’ 구간으로 설정돼 있다. 이후는 이용 기간이 증가할수록 반환 비율이 감소한다.

문제는 선택 약정 위약금이 계약 기간 절반이 지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월 8만원 요금제에 가입하고 2년 약정을 선택했다면, 위약금은 가입 후 12개월까지 점차 증가해 최대 16만원까지 불어나는 식이다. 월 납부 요금에 최대 2.66배를 위약금으로 내야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기가 가능하다.

국내 위약금이 해외와 달리 이례적 형태로 운영될 수 있는 배경에는 지난 2012년 당시 정부가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를 통신사가 관리하도록 한 ‘화이트리스트 제도’가 꼽힌다. 대리점을 통해 IMEI를 등록한 휴대전화만 서비스를 개통해 주면서 통신사 중심의 단말 유통 구조가 안착됐다. 자급제 시장이 크게 형성되지 못하면서 사실상 통신사를 거치지 않고는 휴대전화를 구매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픽=정서희

◇ 美·日·英·佛 통신사, 가입 기간 따라 ‘위약금 감소’

전주용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국내·외 주요 이동통신 사업자의 이용약관 비교 분석’(2024년 1월 정보통신정책연구) 논문에 따르면 미국·일본·영국·프랑스·호주의 지배적 통신사 중 한국처럼 가입 기간 중 위약금 규모가 증가하도록 설계한 곳은 없다. 해외 통신 사업자도 약정 기간을 정해두고 요금을 할인해 주는 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일본의 경우 2019년 10월 전기통신사업법의 개정으로 최대 위약금이 9500엔(약 9만원)에서 1000엔(약 1만원)으로 낮아졌다.

미국 버라이즌도 고급 기기(Advanced Device)와 연동한 요금제를 운영한다. 이 요금제를 이용하면 초기 해지 위약금이 350달러(약 48만원)로 책정된다. 다만 이는 최대치로 가입 기간에 따라 월 10~60달러씩 줄어들어 계약이 만료되면 0원이 된다. 고급 기기와 연동되지 않은 요금제도 같은 구조인데, 초기 위약금은 175달러(약 24만원) 수준이다.

호주 텔스트라도 요금제를 취소한 월에서 사용한 일자만큼 비례해 남은 금액을 위약금으로 낸다. 영국(BT)·프랑스(Orange)도 요금 할인 금액과 위약금을 연동하고는 있지만 한국처럼 가입 기간 중 위약금 규모가 명시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는 아니다.

◇ 소비자 권익 침해할수록 통신사에 유리

한국 통신사의 위약금이 가입 기간 중 규모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이례적·기형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장기 고객에게 통신사 전환의 부담금을 높이는 식으로 설계돼 있어 소비자 권익이 과도하게 침해되고 있다.

전 교수는 “한국 통신사는 ‘할인 금액 반환’에 맞춰 위약금을 책정했는데, 해외는 ‘계약 안정성’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대조된다”며 “우리나라 통신사처럼 계약 유지 기간이 증가하면서 위약금이 늘어나는 구간이 존재하며, 특히 계약 후반부의 위약금이 계약을 지속하는 경우보다 큰 사례는 좀처럼 보기 어려워 이례적”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통신사 전환 장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외 통신사가 약정 기간에 따라 통신 요금을 할인하는 건 소비자가 ‘안정적 수익’을 약속해 준 대가지만, 우리나라는 계약을 유지한 쪽에 되레 불이익을 줘 ‘이탈 방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선 국내 통신사의 위약금 구조가 소비자에게 불리한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가입자 이탈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분석한다.

김주호 참여연대 민생경제팀장은 “지원금·약정 할인 등은 통신 요금 자체를 부풀리는 요소이고, 계약 조기 해지 때 다시 반환해야 하는 구조라 소비자에게 매우 불리하다”며 “정부가 나서 이런 불필요한 제도를 제한하고 통신비 자체를 낮춰 번호이동이 자유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