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 출장을 마치고 지난 3월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지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뉴스1

오랜 기간 침묵을 지키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잇달아 인수합병(M&A)을 단행하며, 삼성전자의 미래 먹거리 발굴에 나섰다. 이달 초 삼성전자 자회사 하만을 통해 미국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를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인수한 데 이어,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를 15억유로(약 2조37000억원)에 사들였다. 이번 인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냉각 장비 분야를 겨냥한 것으로, 급성장하는 AI 인프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14일 영국계 사모펀드 트라이튼이 보유한 플랙트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독일 서부 헤르네에 본사를 둔 플랙트는 데이터센터와 공장 클린룸, 산업·주거용 건물 등에 냉각 솔루션을 제공하는 B2B(기업간거래) 냉난방공조(HVAC) 전문 업체다.

그래픽=손민균

◇ 연 매출 1조원대 유럽 공조 시장 강자… 100년 넘는 노하우 보유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 인수가 삼성전자 자회사인 하만의 오디오 솔루션 사업 역량을 보강하는 차원이었다면, 플랙트 인수는 공조 분야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다. 특히 공조기기는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주목받고 있는 시장이다. 삼성전자는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냉난방 기술에 플랙트의 데이터센터 특화 냉각 솔루션을 접목, AI 인프라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1918년에 설립된 플랙트는 100년 이상의 업력을 보유한 글로벌 공조 전문 기업으로, 직원 수는 3500명이다. 전 세계 65개국 가정, 사무실, 학교, 병원뿐 아니라 첨단 시설에 중앙공조 제품과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연 매출은 지난해 기준 7억3000만유로(약 1조1600억원) 수준이다. 클린룸, 기가팩토리, 데이터센터, 대형 병원, 해양 플랜트, 대규모 주거 단지 등 다양한 B2B(기업대기업) 환경에서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 경험이 풍부하다. 유지보수 전문 인력을 다수 보유한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삼성전자가 플랙트를 인수한 가장 큰 목적은 차세대 성장 시장인 AI 데이터센터 분야 성과를 위한 것인데, 실제 플랙트는 다수의 데이터센터 냉각 설비 수주 사례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마이크로소프트(MS) 더블린 캠퍼스를 비롯해 사우스웨스트 데이터센터, 미드랜드 데이터센터, 네덜란드 UMCG 대학병원 데이터센터 등의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냉난방공조 시장은 크게 ▲공항, 공장 등 대형 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중앙공조와 ▲가정과 상업용 시스템에어컨 시장 중심의 개별공조(덕트리스·Ductless) 로 나뉜다. 삼성전자는 그간 개별공조 제품을 중심으로 공조 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중앙공조는 글로벌 공급 경험과 고도화된 설계 역량이 요구되는 만큼 진입 장벽이 높다. 이재용 회장이 M&A 결단을 내린 것도 이런 전략적 판단이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중앙공조 시장 규모는 지난해 610억달러(약 86조원)에서 오는 2030년 990억달러(약 140조원)로 연평균 8% 성장할 전망이다. 특히 데이터센터 부문은 연평균 18%의 고성장세를 보이며, 오는 2030년에는 441억달러(약 62조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독일 서부 헤르네에 있는 플랙트그룹 본사./플랙트

◇ 오너가 직접 차세대 먹거리 발굴 주도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신사업 발굴에 시동을 걸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오랜 기간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어려웠던 이 회장이 올해 들어 전사적인 홍역을 겪으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스마트폰, TV, 가전 등 기존 사업 분야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차세대 먹거리 발굴을 위해 M&A는 필수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AI 시대에는 하드웨어와 솔루션이 빠르게 진화하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은 자체 연구개발(R&D)뿐 아니라 자본력을 활용한 M&A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다”며 “M&A는 성장 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크기 때문에 최고 의사결정자인 이 회장이 아니면 결단을 내릴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7년 이 회장이 등기이사직에 오른 뒤 단행한 ‘초대형 M&A’ 하만 인수는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수 첫해인 2017년 600억원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1조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한때 실적 부진으로 ‘아픈 손가락’이라고 불렸지만, 반도체 등 주력 사업이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꾸준한 실적 개선세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