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 로고. /연합뉴스

미국 관세 정책 불확실성과 미중 통상전쟁 격화로 인한 영향이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실적에 수치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반도체는 상호관세 대상에서 빠졌으나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에 별도의 25% 품목 관세를 물리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또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보는 손실이 가시화하면서 향후 실적에 미칠 파장에 주목된다.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관세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네덜란드 ASML은 최근 예상보다 부진한 수주 실적을 내놓았다. ASML이 발표한 올해 1분기 수주액은 39억4000만유로(약 6조3000억원)로 블룸버그가 집계한 시장 전망치 평균 48억2000만 유로에 못 미쳤다. 또 ASML은 올해 2분기 매출총이익률을 50∼53%로 전망하며 관세 영향의 불확실성을 고려해 전망치 폭을 평소보다 크게 잡았다.

이와 관련해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에서 “최근 관세 발표로 거시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졌고 상황은 한동안 역동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슈퍼 을(乙)’ 업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ASML 장비를 사용하는 고객사인 만큼 ASML 실적은 반도체 업황 풍향계로도 통한다. ASML의 수주가 기대를 밑돌면 고객사들이 예상보다 수요 전망을 보수적으로 잡고 설비 투자를 보류하거나 미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특히 최근 기술 수요뿐 아니라 관세 불확실성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가 반도체 설비 투자 판단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또 ASML도 네덜란드에서 최종 조립한 장비를 미국에 수출하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는 일부 품목에 필요한 부품 등을 수입할 때 관세 영향권에 놓일 수 있다.

김형태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ASML의 신규 수주는 주요 고객사의 보수적 투자 기조, 계획 지연에 따라 전 분기 대비 급감했다”며 “반도체 장비·부품 관세 우려로 전방 수요 위축 가능성도 언급된다”고 밝혔다.

엔비디아 로고. /연합뉴스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소비시장인 중국을 향해 반도체 수출 제재 수위를 높이자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생태계를 이끄는 엔비디아의 AI 칩 H20을 새로운 중국 수출 허가 품목으로 포함하면서 수출 장벽을 높였다. 엔비디아는 규제 강화로 중국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회계연도 1분기(2∼4월)의 손실을 55억달러(약 7조8000억원)로 예상했다. 수출 규제 강화에 앞서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IT 기업의 칩 주문이 급증했기에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난처한 상황이다.

엔비디아의 대항마로 꼽히는 AMD도 AI 칩 MI308이 중국 수출 허가 품목이 되면서 수출길이 막혀 8억달러(약 1조1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 강화 여파로 업황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최근 엔비디아를 필두로 반도체주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이미 1분기 실적이 나온 반도체 업체들은 대체로 호실적을 발표했으나 관세를 피해 1분기에 수요가 몰린 영향이 커 2분기 실적 향방은 불투명한 상태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올해 1분기 순이익은 3천616억대만달러(약 15조7000억원)로 작년 동기보다 60% 급증했다. 블룸버그 예상치 3468억 대만달러도 웃도는 실적이다. 미국발 관세 폭탄에 대한 우려로 미국에서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재고 비축 수요가 증가한 결과 TSMC가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냈다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삼성전자가 이달 초 발표한 올해 1분기 잠정 영업이익도 4조9000억원대였던 시장 전망치를 큰 폭으로 웃도는 6조6000억원으로 나왔다. 호실적 배경으로는 연초 갤럭시 S25 출시 효과와 함께 관세 시행을 앞두고 예상보다 메모리 수요가 견조해 D램 출하량이 급증한 점이 꼽힌다.

송명섭 iM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관세 부과 이전에 미리 제품을 구매해 놓으려는 수요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출하 증가율이 당초 전망치를 대폭 상회한 데 따른 것”이라며 “2분기에는 메모리 부문에서 전 분기의 관세 부과 전 출하 증가에 따른 기고 효과로 출하량이 당초 예상치를 하회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