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챗GPT

유럽연합(EU)이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AI) 규제법인 ‘AI액트(AI act)’의 세부 규칙을 마무리하기 위한 세 번째 초안을 발표했다. AI 저작권에 대한 부분에서 완화된 표현이 다수 등장해 기존 강경 규제 방침에서 한발 물러난 모양새다. 글로벌 AI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도 지난해 말 통과한 AI 기본법이 규제보다는 육성 중심으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외신 등에 따르면 EU 위원회는 지난 11일(현지시각) 생성형 AI가 포함된 범용 AI(GPAI) 공급자를 대상으로 한 조항을 마무리하기 위한 실무 강령의 세 번째 초안을 발표했다. 실무 강령은 AI법을 집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말한다. EU는 지난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실무 강령 초안을 발표하고 관계자와 기업들의 의견을 반영해 이를 가다듬고 있다. GPAI 공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조항은 올해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 조항은 GPAI 공급자에게 기술문서와 사용설명서 제공, 저작권 지침 준수, 학습에 사용된 데이터의 요약본 공개 등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AI액트는 GPAI를 오픈AI ‘챗GPT’, 메타 ‘라마’ 등과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을 사용하는 AI 서비스로 규정한 만큼 글로벌 생성형 AI 기업이 규제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AI액트 위반 시 최대 연간 수익의 3%를 벌금으로 내게 된다.

다만 이번 초안이 공개되면서 기존 ‘규제 일변도’였던 내용이 완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EU는 “2차 초안에 대한 피드백을 바탕으로 최신 개정안은 이전보다 ‘세련된 공약과 조치가 포함된 간소화된 구조’를 갖췄다”고 밝혔다. 특히 AI 기업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AI 학습 저작권’ 부문을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모델 학습을 위한 데이터를 수집할 때 저작권 침해를 완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 ‘합리적인 조치’ ‘적절한 조치’ 등 구체적이지 않은 표현이 등장했다. 규정이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 적용 의사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기존 초안에서 저작권 문제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면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하기 쉽도록 단일 연락처와 불만 처리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도 사라졌다. 현재는 ‘영향을 받는 권리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연락처를 지정하고 이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변경됐다. 여기에 저작권 불만이 ‘명백히 근거가 없거나 과도할 경우, 특히 반복적이면 조치를 거부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저작권자가 이전에 불만이 제기된 비슷한 사항에 대해 반복적으로 항의를 제기하면 이를 무시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초안 발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AI 규제법을 시행하는 EU가 법 시행 전 한발 후퇴한 모양새라는 평가가 나온다. EU가 기존 계획을 수정한 데는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최근 AI 모델 개발 경쟁은 국가 대항전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AI 데이터센터에 약 730조원을 투자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등 정책적 지원 강화 의지를 밝혔다. 중국은 딥시크로 대표되는 효율적 알고리즘 기반의 고성능 AI 모델을 구현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EU가 AI 산업에 지나친 규제를 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이에 한국의 ‘AI 기본법’ 역시 규제보다는 육성 중심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의 경우 지난해 12월 26일 EU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AI법인 ‘AI 기본법’이 통과됐다. AI 기본법은 이용자의 생명과 안전,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AI 기술을 ‘고영향 AI’로 규정하고 해당 AI 사업자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다만 AI 기본법은 국회 통과 과정에서 과도한 규제 권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단순 민원이나 신고만으로도 당국의 조사권 발동이 가능하다는 조항에 대해 AI 업계는 불만을 제기해왔다.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AI 기본법 하위 법령 제정에 있어 AI 산업의 초기 단계를 고려하여 규제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 11일 열린 월례 브리핑에서 AI 기본법 제정 방향에 대해 “AI 산업이 초기 단계임을 감안해 최소한의 규제 사항만을 포함할 것”이라며 “규제 대상 및 수준에 대한 해석에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과도한 규제에 대한 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과기정통부는 향후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할 계획이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교수는 “유럽의 AI액트가 너무 촘촘하게 규제 사항을 담았다면, 한국 AI 기본법은 현재 내용은 없고 추상성이 높은 상태”라며 “AI 기본법은 AI 산업의 육성과 적절한 규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