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챗GPT 달리3

중국 ‘반도체 굴기’의 첨병 역할을 하는 세계 3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SMIC가 미국의 반도체 제재로 되레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회사인 대만 TSMC가 미국 눈치를 보며 중국 기업의 반도체 생산을 꺼리자, 그 물량이 SMIC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통큰 지원금을 투입하며 중국 기업들의 자국 파운드리를 이용을 적극 유도하고 있습니다.

SMIC는 지난 12일(현지시각)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지난해 4분기 중국 고객 매출이 전년 대비 34%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현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중국 고객사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5%에 달했습니다. SMIC는 “중국 내 반도체 국산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8인치와 12인치 팹(공장) 모두 수요가 증가해 생산능력이 최대치에 도달한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첨단 설비 도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SMIC가 견조한 성장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미 제재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TSMC는 지난해 11월부터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고객사에 7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생산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구형 공정을 필요로 하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도 선제적으로 TSMC 대신 SMIC로 주문을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IT 매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현재 TSMC는 16·14나노 칩 생산을 요청한 중국 반도체 고객사에도 최종 칩 출하가 중단된다고 통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부과 압박을 받고 있는 TSMC는 미 상무부가 정한 ‘화이트리스트(특정 기준을 충족한 기업 목록)’를 철저히 따르며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15일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TSMC, 삼성, 인텔 등 승인된 반도체 조립·테스트업체가 16·14나노 이하 반도체를 중국에 판매하려면 미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BIS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반도체 패키징 업체에서 가공된 칩의 출하를 금지했습니다. 기존에는 중국 팹리스들이 TSMC에서 10나노대 칩을 생산한 뒤 중국 패키징 업체를 거쳐 칩을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TSMC에서 생산된 칩이 ‘비인증’ 패키징 업체에서 가공될 경우 출하가 차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중국 팹리스들은 현지 파운드리로 주문을 전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에 더해 중국 정부는 SMIC의 성장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SMIC는 중국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힘입어 스마트폰, PC 등 전자제품 내수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국 팹리스 고객들이 재고를 늘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들은 중국 정부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점유율 확대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SMIC의 매출총이익률은 2년 전까지만 해도 38%였으나, 지난해 18%로 감소했습니다. 자본 지출 증가로 감가상각 비용이 늘어나고, 첨단 공정 수율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웨이 등으로부터 7나노 이하 칩 주문을 받으며 수익성이 악화된 영향이 큽니다.

그럼에도 SMIC는 공격적인 투자 기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SMIC의 자본 지출 규모는 73억3000만달러(약 10조6500억원)로, TSMC 자본 지출의 4분의 1 수준까지 증가했습니다. 중국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걸친 대규모 투자 덕분에 중국 파운드리 업계는 미 제재에도 파죽지세로 커나가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은 대만에 이어 성숙 공정 파운드리 점유율 세계 2위를 기록했는데, 내후년에는 대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를 전망입니다. 이제 SMIC는 오히려 자국 내 파운드리 경쟁 심화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SMIC는 올해 매출 성장률이 글로벌 파운드리 업계 평균을 넘어설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