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슈퍼컴퓨터(슈퍼컴) 전문가 이지수 박사는 사우디아라비아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로 자리를 옮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장과 국가슈퍼컴퓨팅연구소(NISN)의 초대 소장을 역임한 그가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박사는 1년 만에 KAUST 슈퍼컴 센터 외에도 가시화 센터를 총괄하는 자리로 승진했고, 이제 KAUST 교수 60% 이상과 아람코 등 20여 개의 사우디 주요 기업과 기관이 그의 리더십 아래에 설계된 슈퍼컴을 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중동 세일즈 외교로 국내에서도 사우디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사우디 과학기술계가 그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는 민간 외교 자산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 슈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서 발표된 전 세계 슈퍼컴 순위(톱 500)에서 KAUST가 구축한 슈퍼컴 ‘샤힌 3(Shaheen III)’는 전 세계 20위, 중동 지역 1위를 기록했다. 콘퍼런스 직후 이 센터장을 화상으로 만나 지각변동 중인 슈퍼컴 트렌드, KAUST에서 바라본 중동 비즈니스 전략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사우디에서의 7년을 포함해 그의 슈퍼컴 인생은 34년에 달한다.
슈퍼컴 톱 500을 파고든 AI 컴퓨터
─ 이번 슈퍼컴 콘퍼런스에서 인공지능(AI) 컴퓨터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올해 3등을 차지한 마이크로소프트(MS), 22등을 차지한 네이버, 28위를 기록한 삼성전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상청과 KISTI 등의 전통적인 슈퍼컴들은 순위가 밀렸다. 슈퍼컴 전문회사 크레이(Cray)가 휴렛팩커드(HPE)에 인수됐는데, 크레이 주요 엔지니어들이 MS로 대거 흡수되었다. 이 엔지니어들이 MS와 협력관계에 있는 오픈AI의 ‘챗GPT’ 전용 슈퍼컴을 설계하는 데 참여했다는 소문이다.”
─ 그런 점에서 이번 콘퍼런스는 슈퍼컴 역사의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다. 오랫동안 슈퍼컴은 ‘슈퍼카’ 같은 존재였다. 국가 간 경쟁이 촉발되며 여러 관심은 받았지만 마치 슈퍼카가 그러하듯 컴퓨터 업계의 주류는 아니었다. 거대 컴퓨터로 구동되는 AI 열풍은 이제 슈퍼컴을 주류로 만들고 있다. AI 칩을 만드는 엔비디아는 정점을 향해 치닫는 게 콘퍼런스 현장에서 느껴졌다. 엔비디아의 로드맵을 보니, 전통의 계산 과학용 칩보다 AI용 칩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더라.”
빈 살만, KAUST 새 전략 직접 발표
─ 지난 8월 KAUST 이사장인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KAUST 뉴 스트래티지(new strategy)’를 직접 발표했다.
“2009년 개교 당시 KAUST의 최우선 목표는 신뢰 있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었다. 세계 대학 순위를 집계하는 타임스하이어에듀케이션(THE)에서 KAUST 랭킹은 아랍권 1위이고 교수당 논문 인용 횟수도 세계 1위에 오른 적이 있다(QS 2021).
이제 사우디의 최고 리더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설립한 KAUST가 국가에 기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게 ‘KAUST 뉴 스트래티지’다. 앞으로 KAUST는 사우디 전반의 생산을 혁신하고 고품질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것이다. KAUST 이사회가 명망 있는 글로벌 인사에서 사우디 장관과 아람코 최고경영자(CEO) 등 사우디 인사로 재편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일각에선 KAUST 설립에 든 비용을 최대 50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왕세자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환경 도시 네옴시티(NEOM) 프로젝트에도 KAUST가 참여하고 있더라.
“KAUST 수석 부총장이었던 나드미 말 나스르(Nadhmi Al-Nasr)가 2018년 네옴의 CEO가 되었다. 그는 KAUST 캠퍼스를 1000일 안에 완성하라는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전 사우디 왕의 지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의 탁월한 업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나드미 CEO 외에도 KAUST의 많은 인사들이 네옴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옴과 KAUST의 대표적인 협력 프로젝트는 네옴시티 인근의 슈샤섬의 산호초 복원 사업(KRRI·KAUST Reefscape Restoration Initiative)이다. 세계 최대 규모 산호초를 복원하는 이 사업은 규모 자체도 거대하지만, 네옴의 신달라(Sindalah) 호화 휴양지구와 연계돼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하다.”
중동 비즈니스에서 성과를 내려면
─ 윤석열 대통령의 중동 방문 이후 사우디 비즈니스 기회에 대한 한국 기업의 관심도 뜨겁다.
“내가 들은 초대형 프로젝트만 6개에 달하니, 여기에 다수 기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왕세자는 국내총생산(GDP)의 0.5% 수준인 국가 연구개발 예산도 2040년까지 5배까지 늘리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런데 사우디에서의 비즈니스는 전형적인 ‘톱 다운’ 방식이다. 투자부 장관 등 고위급 접촉이 전체 사업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때로는 주무 부처가 명확치 않은 경우도 많아 내부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왕세자가 KAUST를 비롯해 다수 기관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는 점, 그가 ‘온건 이슬람(Moderate Islam)’을 내세워 젊은이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 이에 걸맞은 가시적인 성과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점 등도 고려하면 좋을 것이다.”
─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였던 사우디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사우디가 앙숙인 시아파 이란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과정에서 양국의 협상을 중재한 나라가 중국이었다.
“사우디를 ‘친중(親中) 국가’라고까지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과의 협력이 여전히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이 국제 협력과 국가 발전을 중시하는 사우디의 리더십을 이해하고 고공 플레이를 하고 있다. AI부터 초대형 빌딩 건설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사우디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잡으려면 서방 국가 기업 뿐만 아니라 중국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슈퍼컴 인생 돌아보니
─ 왜 슈퍼컴을 좋아했나.
“세상의 모든 게 그렇지만, 그냥 우연인 것 같다. 컴퓨터가 그렇게 끌리더라. 1980년 ‘애플 II’ 컴퓨터 복제판이 30만원이었다. 한 달 용돈을 모아 전원 공급장치를 사고 다음 달 용돈을 모아 메인 보드를 사서 수 개월에 걸쳐 조립했다. 결국 케이스는 사지 못했다.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는 각종 물리 문제를 슈퍼컴으로 푸는 걸 공부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2018년 슈퍼컴 전문 미디어 HPCwire는 올해 주목할 인물(People to Watch)로, 2022년 슈퍼컴퓨팅 아시아 학회는 한국인 최초의 공로상 수상자로 이지수 센터장을 선정했다)
─ 최근 오픈AI의 내홍 사태에서 보듯 강한 AI가 도래해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인간의 지적 능력 전체를 대체하는 ‘일반 인공지능(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단시간 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조차 AI가 왜 여러 문제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는지 이유를 모른다. 내가 딥러닝으로 대표되는 AI 접근법에 대해 불편해하는 이유다. AI 접근법의 근본적인 한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이제 나이가 있기 때문에 조직의 장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다. 좀더 공익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 가령, 미국 소아암 센터의 슈퍼컴 도입이나 태국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슈퍼컴 센터 건립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그 지역 젊은이의 성장을 돕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천천히 고민을 이어갈 생각이다.”
👉🏻 킹압둘라과기대(KAUST·King Abdullah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사우디아라비아의 홍해 연안 투왈에 위치한 연구 및 교육에 중점을 둔 국제 대학으로 2009년에 설립됐다. 사우디 최초의 남녀공학 대학으로, 학교명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재임한 당시 사우디 군주 이름에서 따왔다.
+ Plus Point
버킷 리스트에 올려도 좋을 이지수 박사 강추 여행지 5
이지수 센터장은 KAUST 이직 후 장점 중 하나로 ‘일·생활 균형(워라밸)’을 꼽는다. 1년 휴가 일수는 41일.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사우디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 여행이 비교적 쉽다고 한다. 그는 7년간 사우디에 머물면서 여행으로 긴장을 풀었다. 다음은 이 센터장이 가본 최고의 여행지 ‘베스트 5′. 베스트 5는 KAUST가 위치한 홍해 연안 인공 도시 투왈에서 가깝게는 800㎞, 멀게는 5000㎞ 반경에 있는 곳이다. 아래 사진은 그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이다.
① 이집트 룩소(Luxor) 신전 및 왕가의 계곡
이집트 신왕국(New Kingdom)의 수도로 이집트 문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온 느낌. 열기구를 타고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박물관’을 즐기는 것도 강력 추천.
② 요르단 와디 럼(Wadi Rum) 보호구역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경치를 경험할 수 있음. 너무나 색달라 이곳이 정말 지구인지 의심 갈 정도. 지구보다 화성의 풍광에 가까워 영화 ‘마션(Martian)’의 촬영지로 선택된 곳. 많은 사람의 버킷리스트에 있는 페트라(Petra)에 들르게 되면 꼭 추가!
③ 그리스 메테오라(Meteora)
수백미터 바위 기둥들이 끝없이 펼쳐진 경치도 좋지만 그 위에 지어진 동방정교(Eastern Orthodox) 수도원들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수도원 건설에 필요한 물건을 등에 메고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가는 수도승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④ 이탈리아 소렌틴 반도(Sorrentine Peninsula)
살레르노(Salerno), 아말피(Amalfi), 포시타노(Positano), 소렌토(Sorrento)를 연결하는 소렌틴 반도 남부는 깎아지르는 절벽이 바다와 만나 절경을 이룸. 절벽에 위태롭게 지어진 집들이 신비로움을 더함. 편하게 즐길 수 있게 여유 있는 일정을 권한다. 근처의 카프리(Capri)섬도 추천.
⑤핀란드 로바니에미(Rovaniemi)
북극권(Arctic Circle)이 시작되는 진정한 눈의 마을. 낮에는 온통 눈으로 덮인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밤에는 오로라를 볼 수 있다. 12월 23일에는 ‘공식’ 산타 마을에 들러 온 세계에 선물을 배달하기 위해 출발하는 산타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