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 4기로 판명받는다고 곧 말기암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의사가 있다. 바로 김진 고대안암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다.
지난 9일 만난 김진 고대안암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의학적으로 기수가 4기이지만, 치료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면서 “좌절하지 말고 의사를 믿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년에 약 300~400례의 대장암 수술을 하고 있다. 지난 15년간 약 3000례 대장암(직장암·결장암 포함) 수술을 집도하며, 이 분야 발전을 위해 주력해 왔다.
우리 몸의 소화기관 가장 끝부분인 ‘대장’은 약 1.5m에 달하는 긴 장기다. 구불구불한 파이프 모양 관으로 이뤄진 이 대장은 소장 끝에서 시작해 항문으로 이어진다. 대장은 크게 결장과 직장으로 이뤄져 있다.
이처럼 중요한 소화기관인 대장에 종양이 발생해 고통받는 국내 환자가 많아지고 있다. 과다한 육류섭취, 섬유질 섭취 부족 등으로 대장암은 위암 다음으로 흔한 암이 됐다. 2019년 발표된 중앙암등록본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국내에서 대장암으로 진단받은 환자는 2만8111명으로 전체 암 발생(23만2255명)의 12%를 차지했다.
국내 암 발생률 2위인 대장암은 수술을 받고 난 후에도 10명 중 2명이 재발하거나 전이돼 완치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암이 재발할 경우 수술 난이도는 더 올라간다. 김진 교수는 재발성 대장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을 세계 최고 수준인 40%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의사다. 특히 재발성 직장암의 경우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비율이 40%가 되지 않고 암이 재발한 부위와 전이된 부위를 완벽하게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 대장암 수술보다 난이도가 높을 뿐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도 적다. 김 교수는 국내를 넘어 아랍, 러시아, 인도, 카자흐스탄 등에서 오는 환자를 치료하며 대장암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기 전인 2019년 한 해에만 인도·홍콩·싱가포르 등 해외 의료진에게 의술을 전수하기 위해 12번을 해외를 왕복했다.
그는 “쉬운 것은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수술을 해나가는 과정 자체도 보람 있는데, 이러한 외과의사로서의 삶이 곧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에서 더욱 뜻깊다”고 강조했다. 외과 분야에서도 대장항문 분야의 전문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 즐겁다’는 그만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암 환자들은 암 절제 시 항문보존을 하지 못하게 돼서, 인공장루를 사용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직장암판정을 받은 환자가 주로 묻는 말이 ‘배변주머니를 차느냐’다. 고대안암병원 대장암수술센터를 찾아 진료를 받는 대장암 환자는 연간 5000여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약 45%는 암 절제 시 항문보존이 힘들어 자칫 인공장루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직장암 환자들이다. 하지만 이 병원에서는 항문기능을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수술기법을 도입한다. 김 교수는 “직장암 수술 후 항문기능을 상실해 복벽에 인공항문을 만들어주는 비율은 5%도 안 된다”면서 “직장에 생긴 암을 도려낼 때 가능한 항문기능을 살려 놓는 항문보존 괄약근간절제술을 시행해 수술 후 삶의 질이 일반인과 별반 차이가 없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재발성 대장암의 경우 암이 추가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골반, 자궁, 방광 등을 모두 절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종양 부위가 혈관, 림프절 등과 맞닿아 있어 수술 난이도가 높다. 수술시간도 12~13시간 이어지기도 한다. 김 교수는 “암과 충분한 거리를 두되, 최소한의 절제를 통해 각 장기의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종양만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다. 하지만 정교하고 복잡한 암 수술의 경우엔 다를 수 있다. 그는 “늘 어려운 수술일수록 머릿속에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수술 부위 윤곽을 그려보고, 구현해 본다”면서 “다른 병원에서도 수술이 어렵다고 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도 많아, 그들에게 최적의 수술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이탈리아말인 이 어휘는 르네상스기에 ‘어려운 일을 쉽고 세련되게’하는 천재의 방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 교수는 스프레차투라 분위기를 풍기는 의사다. 그는 “대장암과 관련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부쩍이나 힘들고 고단하다”면서 “하지만 이러한 일을 결과적으로 쉽게 풀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외과의사는 고령이거나 암 수술 부위가 복잡할 경우 ‘수술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기도 한다. 그는 “무리하지는 않는 선에서, 조금 어렵더라도 환자 생존율을 높기 위해 수술을 시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줌(Zoom) 프로그램으로 의료진과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서전 크리에이티비티(surgeon creativity, 수술의 창조성)’를 주제로 강연도 했다.
고대안암병원 대장암수술센터 개복수술과 복강경수술 비율은 2%대 98%다. 즉 거의 모든 수술이 복강경 수술로 진행된다는 얘기다. 복강경 수술이란 제대주위에 1㎝의 복벽 구멍을 만든 후 복강 속에 이산화탄소 가스를 넣어 복강내 기복을 만들어 수술 공간을 확보한 다음 비디오 모니터를 보면서 필요에 따라 5㎜ 또는 10㎜의 구멍 1~4개를 배에 뚫고 이를 이용해 복강경 수술기구를 삽입, 수술하는 것을 말한다. 흉터부위와 통증이 적고 회복이 빠른 ‘최소침습’ 수술이다. 직장암과 같이 수술범위가 좁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들여다보기가 어렵고, 외과적으로 보다 정교한 처치가 필요하다 판단될 때는 로봇을 활용하기도 한다. 고대안암병원 대장암수술센터는 김 교수 외에도 대장암 분야 권위자 김선한 교수를 필두로 곽정면 교수, 백세진 교수 등이 이끌고 있다. 김 교수는 “매주 의료진들이 수술 사례를 논의하면서 더 성공적인 수술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장암은 국가 암 검진 권고안에 따라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만 받으면 조기 발견으로 90% 이상 완치할 수 있다. 그는 “먹고 싶은 것 먹고, 건강검진을 잘하는 것이 암을 예방하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