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관영 언론은 온라인 게임을 ‘정신적 아편’이라고 불렀다. 한때 반년 넘게 판호(중국 내 게임 서비스 허가) 발급을 전면 중단할 정도였다. 그러나 침체하고 있는 여타 산업과 달리 게임 산업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이에 정부도 태도를 전환했다. ‘원신’에 이어 ‘검은신화: 오공’이 중국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 히트를 쳤고, 그간 감춰져 있던 중국 게임 업체의 개발력도 세계 시장에서 입증됐다.

'명말: 공허의 깃털' 게임 실행 장면. 지금의 쓰촨성인 고대 ‘촉(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게임은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스팀 제공

이런 가운데, 지난 24일 공개된 ‘명말(明末): 공허의 깃털’(이하 명말)이 출시 첫날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에서 단숨에 인기 게임 순위에 올랐다. 국내에서도 유튜브와 소셜미디어(SNS) 등에 리뷰가 쏟아지고, 게임을 개발한 링쩌(灵泽)테크놀로지(이하 링쩌)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 출시 동시에 관심 집중된 ‘명말’, 中 신생 업체가 개발

회사에 따르면 명말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명나라 말기, 기억을 잃은 여전사 ‘우창’이 ‘깃털병’이라는 전염병이 퍼진 혼돈 속에서 여동생의 죽음과 자신의 정체, 그리고 이 세계에 얽힌 진실을 찾아 깃털병에 감염된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줄거리다. 플레이 내용에 따라 여러 개의 결말을 볼 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소울라이크 장르로, 게임 개발 기간은 무려 6년에 달한다. 정가 기준 일반판은 248위안(약 4만8000원), 디럭스판은 298위안(약 5만7000원)으로 책정됐다.

게임은 출시 이틀 전부터 예약 판매가 급증해 스팀 글로벌 판매 순위 1위에 오르며 관심을 모았다. 출시 당일인 24일 오후 기준 글로벌 인기 게임 2위를 차지했다. 중화권 뿐만 아니라 미주와 유럽에서도 5위 안에 들며 고르게 랭킹됐다. 스팀에 따르면, 게임은 정식 출시 30분 만에 동시 접속자 수가 9만6600명을 돌파했고, 한 시간 후에는 11만명을 넘겼다. 중국의 앞선 흥행작 ‘오공’보다는 적지만, 신생 개발사로선 주목할 성과다.

'명말: 공허의 깃털'이 출시 당일인 지난 24일 스팀 최고 인기 게임(글로벌 기준) 2위에 올랐다. /스팀 캡처

중국 차이신에 따르면 게임을 개발한 링쩌는 2016년에 설립된 신생 회사다. 가상현실(VR) 게임 개발로 시작, 2018년 콘솔 게임으로 개발 분야를 전환해 2019년에 명말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현재 직원 수는 약 300명이며, 주요 창업진은 게임의 배경이 된 쓰촨(四川) 출신이다. 2020년 자금난에 시달려 프로젝트가 좌초될 뻔 했으나 정부 보조금으로 기사회생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링쩌는 같은 해 청두의 ‘톈푸창다오 디지털 문화창의 단지’에 1호로 입주했다. ‘100m 산업 사슬’ 구축을 목표로 하는 이 단지에는 디지털 콘텐츠 기업이 밀집해 있다. 유사 업종 기업들을 한 데 모아 시너지를 극대화하려는 취지다. 실제로 명말 제작에는 수십개 기업이 참여했는데 그 중 절반 가까이는 청두 소재 기업이다.

◇ 지방정부 손 잡고 역사·문화 고증… “해외 확장 한계” 지적도

약 4000년 역사라는 방대한 오리지널 IP(지식재산)를 가진 중국답게, 명말 역시 고대 역사에서 착안해 개발됐다. 3~4세기경에 쓰인 고대 문헌 ‘화양국지(華陽國志)’와 ‘촉왕본기(蜀王本紀)’에서 지금의 쓰촨 지역인 촉(蜀) 지역의 역사와 신화를 차용했다.

고증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게임 속 비플레이어 캐릭터(NPC) 대사를 쓰촨 방언으로 구성했고, 실체 고건축물을 디지털 스캔해 게임에 구현했다. 이 과정에서 청두(成都)시가 문화재 실측을 지원했다. 청두시는 앞서 ‘오공’ 흥행 효과로 게임의 배경지인 산시(山西)성에 관광 붐이 일었던 것처럼, 명말의 흥행이 문화관광 흥행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다만, 현지 유저들에게 몰입감을 선사한 이런 역사·문화적 디테일이 해외 시장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차이신은 “명말 역시 중국 순수 IP 게임이 해외 진출 시 겪는 구조적 어려움을 피하기 어렵다”며 ▲문화적 맥락 전달의 한계 ▲유통 채널 경쟁력의 상대적 약세 ▲시장 수용까지의 긴 시간 등을 한계로 꼽았다.

차이신은 이어 “중국의 ‘서유기(西遊記)’라는 고전 IP가 해외에서 ‘몽키 킹(Monkey King)’으로 불리며 꽤 인지도를 갖췄지만 ‘오공’은 글로벌 시장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드러냈다”며 “명말은 중국 내에선 뛰어난 역사, 현장 고증 등을 내세웠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전략을 쓸 수 없어, 여성 주인공의 복장을 부각한 나머지 이용자들 사이에서 선정성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고 했다.

'명말: 공허의 깃털'에 쓰촨 지역의 고대 건축물이 표현된 모습. 개발사 링쩌는 청두시 지원을 받아 실제 문화재를 게임 배경과 구조물로 재현했다. 샤쓰위안 최고기술책임자는 신화통신에 "훌륭한 게임플레이는 우리 작업의 핵심이지만, 훌륭한 작품의 근간은 언제나 문화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스팀 제공

게임 진행 방식 자체가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지나치게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 매체 시나닷컴은 명말에 대한 평가과 논란을 다룬 보도에서 “대부분의 리뷰는 게임의 시각적인 표현과 미술 스타일, 세계관 구성 등을 높이 평가했지만,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논란되고 있다”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게임은 여성 캐릭터가 고통과 억압을 겪는 스토리 전개 이후, 보상으로 노출이 심한 의상을 획득하는 스토리가 등장한다. 시나닷컴은 이에 대해 “이러한 연출은 일부 플레이어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며 “실제로 이러한 설정 방식이 일부 매체가 평가를 절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했다.

◇ ‘정신적 아편’은 옛말… 게임 산업 띄우는 中

중국 정부는 그간 온라인 게임을 ‘정신적 아편’이라고 부를 만큼 엄격하게 규제해 왔다. 법을 제정해 청소년은 일주일에 3시간만까지만 온라인 게임을 허용하고, 게임 이용자의 지출 한도를 정해둘 정도였다. 판호 발급도 8개월간 끊겼다.

이 때문에 중국 게임 업체 1만곳 이상이 폐업했고 주요 게임업체인 텐센트와 넷이즈도 시가총액이 총 100조원 넘게 증발했다. 글로벌 게임 산업은 빠르게 규모를 불리고 있는데, 중국에선 규제에 가로막혀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산업이 쪼그라들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방향 수정에 나섰다. 태세를 전환해 게임 산업 띄우기에 나선 것이다. 중국 정부는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매년 1억위안(약 190억원)가량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고, 판호 발급량도 늘리고 있다. 중국 국가신문출판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총 757개의 중국 온라인 게임이 판호를 발급받았다. 전년 대비 18% 늘어난 수치다. 특히 6월 한달 동안 발급된 판호 수는 2022년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이달 1~22일엔 총 127개의 중국 게임이 판호를 발급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