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보복 소비’ 열풍을 이끌었던 여행 시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여름 휴가철 성수기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세계 최대 소비 시장 미국을 중심으로 여행 수요는 급격히 얼어 붙었다.

항공권과 호텔 가격은 일찍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소비자들은 여행 계획을 미루거나, 막바지 ‘땡처리’ 상품으로 눈을 돌리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16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 90일간 미국 공항을 거쳐 간 여행객 수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줄었다. 팬데믹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 이후 첫 감소세다.

2025년 5월 22일, 뉴저지주 뉴어크의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에서 여행객들이 현충일 연휴를 떠나기 위해 체크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행 수요 감소는 가격 지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미 노동통계국(BLS) 발표에 따르면 항공권과 호텔 숙박료는 지난 4월과 5월 사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하락세로 전환했다.

여행업계 전문가들은 “일부 국가에서 여전히 특정 인기 노선 항공권을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이는 팬데믹 이후 불균형하게 회복된 항공 공급망 문제와 특정 수요 쏠림 현상이 겹친 결과”라며 “공급 과잉이 아닌 수요 위축에 따른 거시적 둔화가 뚜렷하다”고 분석했다.

미국 여행시장 위축이 전 세계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상당하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 Tourism)에 따르면 미국인 관광객은 해외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국가다. 2023년 한 해에만 해외여행으로 1750억 달러(약 240조원) 이상을 지출했다. 전 세계 관광지출의 약 16% 수준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관광객은 전체 관광 수입 비중 40%를 차지한다.

이런 미국인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하면, 이들을 주요 소비자로 삼던 유럽과 카리브해, 아시아 등 전 세계 관광지는 연쇄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2025년 5월 24일 현충일 연휴 기간 동안 여행객들이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항공사 직원에게 서류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물가와 경제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미국 소비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먼저 여행 지출부터 줄였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가 신용·체크카드 지출 내역을 분석한 결과, 올해 5월까지 미국인들 숙박과 항공료 지출은 모든 소득 계층에서 2024년 같은 기간보다 확연히 줄었다.

유럽과 아시아 주요국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영국에서는 언스트앤영 설문 결과, 생활비 압박으로 응답자 가운데 54%가 올 여름 휴가 계획을 줄이거나 취소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프랑스 통계기관 엘라브는 여론 조사 응답자 70% 이상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휴가 예산을 줄일 계획이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유럽 대륙 전반에도 올해는 알뜰 여행 기조가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시장 상황은 더 복합적이다. 일본은 엔화 가치 약세 덕에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반면 일본인들은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교통공사(JTB)는 올 여름 해외로 떠나는 일본인 여행객 수가 코로나19 이전 2019년 대비 50%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비싼 항공료와 해외 물가에 부담을 느낀 이들이 국내 여행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를 모았던 중국 해외여행 시장 역시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디다. 중국여유연구원(CTA)에 따르면 올해 중국인들 해외여행은 2019년 대비 약 80% 수준까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만성적인 경기 침체와 부동산 시장 불안, 까다로운 비자 문제 등이 겹치며 점차 해외보다 중국 국내 여행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4년 8월 일본 도쿄 센소지 사원을 방문한 방문객들이 가미나리몬 문을 통과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일부 소비자들은 여행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여행 방식을 바꾸고 있다.

세계적인 여행 예약 플랫폼 부킹홀딩스의 에우트 스틴버겐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파이낸셜타임즈 인터뷰에서 ‘더 짧은 여행’ 혹은 ‘막바지 예약’ 구매 수요가 늘었다고 답했다.

일단 버티다가 출발 직전 ‘땡처리’로 나오는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거나, 미국 뉴욕에서 유럽으로 휴가를 떠나는 대신 차를 몰고 인근 휴양지로 2박 3일 일정 여행을 떠나는 식이다.

리서치 그룹 투어리즘 이코노믹스는 “소비자들이 여행을 취소하는 대신 집에서 더 가깝거나 기간이 짧은 여행으로 ‘하향 조정(Trading down)’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