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남아 선호 사상에 입각해 여아를 낙태하는 이른바 ‘젠더사이드(gendercide·성별 학살)‘가 세계적으로 발생했으나 이같은 현상이 종식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성비 불균형이 유독 심각했던 아시아 국가들에서 출생 성비가 뚜렷이 정상화되면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남아 선호 풍조에 마침표가 찍히고 있다는 평가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각국의 출생 성비를 분석, 세계적으로 여아를 선호하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를 집중 조명했다. 초음파 기술의 대중화로 태아의 성별을 조기에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1980년대 이후 다양한 국가에서는 여아 낙태가 급증한 바 있다. 유엔에 따르면 2000년 1년 간 출생 통계에서 낙태로 사라진(missing) 여아는 160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낙태 여아 수는 꾸준히 감소세를 보여 올해는 그 수치가 2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2006년 남녀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가 117.8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 지난해는 109.8명으로 떨어졌다. 인도 역시 2010년 109.6명에서 지난해 106.8명으로 개선됐고, 한국도 1990년 115.7명이라는 전례없는 성비에서 최근 정상 범위로 돌아섰다. 남아 선호 문화 약화와 정부 정책, 성평등 교육 확산이 결합된 결과로 풀이된다.
성비 정상화는 단지 인구 통계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안정과 직결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성비 불균형 완화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해석된다. 과거 성비 불균형으로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한 남성들이 증가하자 이들은 범죄·폭력 등 사회 불안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아시아 6개국에서 성비 왜곡은 성범죄 증가와 비례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중국에서는 공권력 강화를 유도하는 배경이 된 바 있다.
◇세계적으로 ‘여아 선호’ 풍조…남성에 대한 구조적 우려 때문
눈여겨볼 점은 여아 낙태 감소를 넘어 일부 지역에서는 이제 ‘여아 선호’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생 성비 자체가 역전될 정도로 극심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현상은 설문조사, 입양, 시험관 시술 등 전반에서 뚜렷해지고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자녀를 하나만 낳기를 희망하는 가정에서 딸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고, 미국과 북유럽 등지에서도 첫째가 남아인 경우에 둘째 출산을 시도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여아 선호 현상이 ‘딸이 더 다정하고 양육하기 쉽다’는 인식을 넘어 남성에 대한 구조적 우려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전 세계 교도소 수감자의 93%는 남성이며, 남학생은 학업 성취도 면에서 여학생에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 미국심리학협회 학술지에 2014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1914년부터 2011년까지 30개국의 학교 성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 1세기 동안 여학생은 모든 과목에서 남학생보다 성적이 우수했다.
OECD 조사에 따르면 고등교육 이수율은 여성(54%)이 남성(41%)을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성은 최고경영자 비율은 높지만 동시에 실업률도 높기에 사회 하위층에 과도하게 분포된 양극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에 일부 국가에서는 남학생 집중 지원 정책도 논의되고 있다. ▲남학생이 초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도록 입학 연령을 유연하게 조정하거나 ▲초등학교 내 남교사를 늘려 남학생들이 따를 수 있는 롤모델을 확보하고 ▲교육과정 내 보다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활동을 늘리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또다른 불평등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전문가들 “문화·기술·정책 융화 필요"
성비 재구성 과정에서는 경계해야 할 지점도 존재한다. 사회가 ‘여아 우위’로 재편될 경우 또 다른 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 인구가 많은 사회에서는 일부 남성이 결혼·연애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며 관계를 무책임하게 대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20대 남성의 보수화 현상 또한 여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낙오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의 발전이 자칫 남아 낙태로 이어지지 않도록 신경쓸 필요성도 대두된다. 이미 시험관 시술에서 아기의 성별을 선택하거나 임신 초기 혈액 검사를 통해 태아 성별을 확인한 후 낙태를 결정하는 사례가 속속 발생하고 있다. 향후 유전자 편집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태아의 성별 선택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부활할 여지가 있다.
결국 전문가들은 문화와 기술, 정책이라는 3박자가 균형을 이뤄야만 성비 정상화가 부작용 없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미국 소년·남성연구소(American Institute for Boys and Men)의 리처드 본 리브스 소장은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의 삶이 재구성될 동안 남성의 삶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며 “이젠 남성의 문제까지 품고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