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자금 흐름을 차단하겠다며 국경 지역 현금서비스업체에 강도 높은 규제를 시행하면서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일선에선 “사실상 전면 감시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일부 연방법원도 위헌 가능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9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최근 미국 재무부 산하 자금세탁방지국(FinCEN)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 인근 30개 우편번호(ZIP Code)에 위치한 현금서비스업체에 200달러(약 27만2860원) 이상 환전·송금 거래 시 고객의 신원 정보를 포함한 보고를 올릴 것을 의무화했다. 기존에는 1만달러(약 1464만원) 이상 거래에만 보고 의무가 있었으나, 이번 규제로 기준이 대폭 강화됐다.
국경 인근 송금업체의 주 고객층이 이주 노동자, 해외 유학생, 여행객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불편도 크게 가중될 전망이다. 해당 조치는 올해 9월까지 적용되며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보고 거래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송금업체들이 과도한 행정 부담에 시달리게 됐다는 점이다. 텍사스의 한 송금업체는 기존 월 5건 안팎이던 보고 건수가 6000건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으며 인근 또 다른 업체는 31건에서 7276건으로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가 제시한 건당 보고 소요 시간(20분) 기준으로 환산하면 매달 약 300명의 전담 인력이 추가로 필요한 수준이다.
현장의 부담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텍사스에서 송금업체를 운영 중인 애슐리 라이트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고객들이 사회보장번호(미국식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한 개인정보 제공을 꺼려 하루 평균 10명 이상씩 이탈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보고 누락 시 건당 최대 1400달러(약 190만원)의 벌금을 물 수 있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업계는 정부 조치에 제동을 걸기 위해 행정 소송에도 나서고 있다. 캘리포니아 남부 연방법원은 최근 샌디에이고와 임페리얼 카운티 내 업체들에 대해 규제 시행을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텍사스 연방법원의 프레드 비어리 판사도 “불법 자금 추적이라는 목적은 정당하지만 현 방식은 파리를 잡기 위해 나팔총(blunderbuss)을 쏘는 것과 같다”며 위헌 소지를 언급했다.
다만 텍사스에서는 일부 업체에만 효력이 제한적으로 적용, 대부분의 송금업체는 여전히 보고 의무를 지닌 상태다.
미국의 자유주의 성향 공익 법률단체 ‘정의연구소(Institute for Justice)’는 “정부가 국경 지역 전체를 범죄의 온상처럼 몰아가고 있다”며 “실제 송금업체 이용자는 웨이터, 교사, 건설 노동자, 병원 방문객 등 평범한 시민들”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번 조치가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 안보 전략의 일환이나 처음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일례로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패션 지구, 2015년에는 마이애미 전자기기 수출업체를 대상으로 3000달러(약 409만원) 이상 현금 거래 시 보고를 의무화한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번처럼 기준이 대폭 강화된 전례는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해당 규제가 마약 거래 차단이라는 본 목적과 달리 지역 경제만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텍사스에서 소규모 편의점 겸 송금업체를 운영하는 안드레스 파얀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체크캐싱(check-cashing)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규제 대상이 됐다”며 “조치 이후 고객 수가 30% 가까이 줄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