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휴전 중에도 서로 날을 세우며 무역 장벽을 높여가던 미국과 중국이 9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또 한 번의 무역협상을 벌인다. 지난달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세 휴전에 합의한 지 약 한 달 만이다. 양국은 이날 중국의 희토류 수출 재개와 미국의 대중(對中) 기술 수출 통제 완화 등을 논의할 전망이다.
중국을 대표해 이날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인물은 6월 8~13일 영국을 방문 중인 허리펑 국무원 부총리다. 앞선 제네바 합의 역시 제네바를 방문 중이던 그가 중국을 대표해 합의를 이끌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랜 측근이자, 해외 기업인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불린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허리펑은 제20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중앙재정경제판공실 주임을 겸하고 있다. 시진핑 집권 3기의 경제 정책을 이끌고 있다. 1955년생으로 1973년에 공직 입문, 1981년에 공산당 입당했다. 푸젠성 샤먼대에서 금융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통으로, 샤먼에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그가 시 주석, 해외 투자자와 처음 연을 맺은 곳 역시 샤먼이다. 그가 관료로 있었던 1980년대 중반 당시 샤먼은 해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여러 정책 실험을 했다. 허리펑은 이 시기 샤먼의 신임 부시장으로 임명된 ‘정치 신인 시진핑’과도 연을 맺었다. 이후 시 주석이 2008년 중국 부주석에 취임해 유력한 차기 지도자가 됐을 때, 허리펑 역시 그를 따라 수도 베이징 인근의 톈진으로 전근을 갔다. 톈진에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국무원 부총리직은 2023년 3월 임명됐다. 중국 정부를 대표해 서방의 정치인과 기업인을 만나는 중개자 역할이다. WSJ은 그의 역할을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제재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집중하는 핵심 설계자” “서방으로부터 중국의 체계와 경제를 보호하는 문지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난 2년 간 서방을 중심으로 중국 제조업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고 무역 긴장이 심화해 중국 경제에 불확실성이 짙어지자, 그는 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서방을 만나고 있다. 로이터통신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소프트(SCMP)에 따르면 허리펑은 지난 1년 동안 외국인 투자자 등과 60회 이상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취임 직후 1년(45회)보다 월등히 증가한 것이다. 허리펑은 앞서 2024년 4월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도 만나 경제산업 협력을 논의한 바 있다.
허리펑은 혁신가는 아니지만 실무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로이터가 허리펑을 만난 13명의 외국인 투자자와 외교관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허리펑은 임명 초기엔 서툰 영어를 구사하며 준비된 발언에서 벗어나기를 꺼리던 ‘딱딱한 공산당 간부’ 이미지가 강했다. 해외 체류 경험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경력을 중국 지방정부에서 보낸 탓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기업인들로부터 “인공지능(AI)과 대화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특히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경제학자인 전임자와 더 비교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로이터에 따르면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뛰어난 일처리 능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특히 그는 미·중 관계가 불확실성으로 덮인 가운데에서도 미국 기업인들에게 예측 가능하며 자신감 있는 모습들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WSJ은 허리펑에 대해 “다국적 기업 임원들이 줄을 서서 만나려고 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외신은 그가 시 주석의 의중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친밀한 인물인 점이 이번 무역 협상을 긍정적인 결과로 이끄는 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의 닐 토마스 연구원을 인용해 “허리펑 부총리와 시 주석 간의 긴밀한 관계는 협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이 관계는 시 주석이 이번 무역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고 자신이 원하는 미·중 관계의 방향성을 신뢰성 있게 보여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