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헤드폰이 아니다.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소리 철학이자, 기술 분야로 대전환이다.”

세계적인 고가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가 29일(현지시각) 1만5000달러(약 2100만원)짜리 무선 헤드폰을 공개했다.

1837년 마구(馬具) 용품점으로 시작해 가죽공예로 정점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에르메스가 창립 188년 만에 처음 내놓은 헤드폰이다. 명품업계 ‘다음 격전지’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가 올여름 출시할 헤드폰. /에르메스

29일 미국 씨넷에 따르면 에르메스는 “헤드폰은 그동안 기능적 오디오 기기였지만, 이제 디자인 오브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소리를 감각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음향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어지간한 소형차 가격에 근접한 이 에르메스 첫 헤드폰은 에르메스가 직접 운영하는 초고가 맞춤 제작 부서 ‘아틀리에 오리종’이 2년간 개발한 결과물이다.

에르메스에 따르면 분야별 약 50명 전문 장인이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소리미학을 적용하기 위해 모든 과정을 자체 수행한다. 헤드폰 겉면은 이 브랜드를 상징하는 여성 가방 ‘켈리백’을 마감하는 손바느질로 장식했다. 금속 부품과 가죽도 켈리백과 동일한 소재를 적용했다.

단순한 부품 조립을 넘어, 제품 기획 단계부터 장인정신을 투영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에르메스가 IT 업계에 던진 ‘깜짝’ 도전장은 사실 예고된 수순에 가깝다. 이미 주요 명품 브랜드들은 수년 전부터 소리 없는 테크 전쟁을 벌이고 있다.

루이비통은 2019년 이후 오디오 브랜드 ‘마스터앤다이내믹’과 협업해 100만원대 후반에서 200만원이 넘는 고가 이어폰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이 제품들은 해를 거듭할 수록 배우 차은우, 축구선수 손흥민 같은 유명인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젊고 세련된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샤넬 역시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 멤버 제니가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고가 이어폰 액세서리, 과거 IT 주변기기 브랜드와의 한정판 협업 등으로 기술과 패션 사이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해왔다.

2023년 루이비통이 선보인 탕부르 라인 3세대 이어폰. /루이비통

명품 소비 주축으로 떠오른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전통적인 소유 중심 과시형 소비보다, 일상에서 브랜드를 경험하고 가치를 느끼는 데 중점을 둔다.

고가 가방이나 의류를 특별한 날에만 사용하는 대신, 매일 사용하는 헤드폰이나 스마트워치 등을 통해 은밀하게 자신의 취향과 가치를 드러낸다.

패션 전문 매체 디 페민은 “젊은 부유층 사이에서는 눈에 바로 들어오는 가방이나 신발보다 고가 헤드폰처럼 새로운 형태 ‘사회적 증표(Social Signifier)’가 강렬하게 기억된다”고 전했다.

가죽제품이나 의류처럼 기존 고가품 브랜드가 주력하던 상품은 최근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성장세가 정체했다.

20일 프랑스 명품 기업 샤넬이 발표한 지난해 매출은 187억달러(약 25조8200억원)로 1년 전과 비교해 4.3% 줄었다. 영업이익은 30% 감소했다. 샤넬 매출과 영업이익이 동시에 감소한 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매장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2020년 이후 4년 만이다.

지난해 7월 샤넬 코코 크러쉬 팝업 행사장에 참석한 블랙핑크 제니의 이어폰 '샤넬 프리미에르 사운드 워치'. /샤넬

전문가들은 고가품 브랜드들이 새 시장을 개척해 지속적인 성장 요인을 확보하고, 생명력을 연장하는 차원에서 ‘IT 외도’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IT 기기는 기술 변화가 빨라 신선하고 혁신적인 이미지를 브랜드에 지속적으로 부여하기 좋다.

이들은 삼성전자(005930)나 소니처럼 절대적인 기술 우위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고가품 브랜드가 그동안 쌓은 고유하고 감성적인 가치를 기술과 섞어 소비자에게 차별화한 만족감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루이비통처럼 기술은 전문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는 식으로 약점을 보완하고, 브랜드는 디자인과 마케팅에 집중하는 전략도 자주 쓰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고가품 브랜드가 내놓는 수백만~수천만원짜리 IT 기기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아직 첨예하게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수천만원짜리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은 어떤 느낌일까’라는 호기심과 동경, 브랜드 충성도 높은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이어진다.

다른 편에서는 과도한 가격 거품으로 시장을 혼탁하게 만들고, 음질보다 로고 값에 집중한 겉만 번지르르한 제품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공존한다.

패션 전문 매체 하이퍼비스트는 전문가를 인용해 “에르메스가 향후 스피커, DJ 테이블 등 오디오 라인업 확장을 예고한 것처럼 이런 시도는 일시적 유행이 아닌 장기적인 브랜드 전략의 일환”이라며 “럭셔리라는 정의를 기술 시대로 확장하려는 야심찬 도전”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