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유로화가 글로벌 통화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기준금리 인하를 두고 복잡한 셈법에 직면해 있다. 이 가운데 프랑스에서 시작된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이 둔화되는 현상) 흐름이 유로존 전반에 확산되며 ECB의 금리 인하 기대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ECB 내부에서도 금리 인하를 둘러싼 의견 차가 벌어지고 있어 이목을 끈다.
27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프랑스의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0.6%로, 시장 예상치(0.9%)를 하회했다. 서비스와 에너지 물가가 안정된 덕분이다. 프랑수아 빌루아 드 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는 “디스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시장에서는 ECB가 6월 5일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해 2.0%까지 낮출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는 중기 물가상승률 목표치(2%)를 밑도는 현재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ECB는 지난해 6월 이후 이미 7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하한 바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이러한 환경이 유로화에는 전략적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26일 유로화가 미국 달러의 불안정성에 대응할 수 있는 국제 통화로서 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라가르드는 “유로는 스스로 영향력을 얻어야 한다”며 유럽 단일 시장의 완성과 공동 재정 운용, 강력한 안보 체계를 강조했다. 투자자 신뢰 확보를 위한 군사력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이러한 국제 통화로서의 유로화 위상 강화를 위해서는 단기 경기 부양 뿐 아니라 구조적 개혁과 정책 안정성, 법·제도적 기반 확충이 필수 과제로 꼽힌다. 라가르드는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질 경우 유로존 국가들이 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며, 환율 불안정성에도 보다 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리 인하를 둘러싼 ECB 내부의 의견은 뚜렷하게 양분된다. 인하를 지지하는 측에는 라가르드 총재 외에도 피에르 분슈 벨기에 중앙은행 총재가 있다. 분슈 총재는 유로존의 수요 부진과 낮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무역 갈등이 있더라도 추가 금리 인하 여지는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현재의 낮은 인플레이션을 고려할 때 올해 안에 기준금리를 2%보다 조금 낮은 수준까지 더 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대표적인 매파 인사인 로버트 홀츠만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27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금리를 비축해야 할 시기”라며 조기 인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추가 인하는 유로존 경제에 실질적인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역 갈등 등 외부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도 그가 언급한 주요 변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음 달 1일부터 유럽연합(EU) 수입품에 대해 최대 50%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다만 이후 협상이 이뤄지면서 이 관세는 7월 9일까지 유예된 상태다. 금리 인하 반대파인 ECB 인사들은 금리를 너무 일찍 낮췄다간 나중에 대응할 수단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사벨 슈나벨 ECB 이사 역시 “무역 갈등이 물가를 다시 자극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