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시각) 워싱턴 DC 한복판에서 총격으로 살해 당한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야론 리신스키와 사라 밀그램 커플은 가자 전쟁이 촉발한 반(反)유대주의 증오범죄가 일반인 삶에 비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로 보여줬다.
현장에서 붙잡힌 용의자 엘리아스 로드리게스는 범행 직후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쳤다. 연방 당국은 이번 사건을 증오범죄이자 테러 행위로 수사 중이다.
워싱턴DC 경찰 당국에 따르면 두 사람은 퇴근길 미국유대인위원회(AJC) 행사를 마치고 캐피털 유대인 박물관 인근에서 총격을 당했다.
용의자는 사전에 박물관 밖을 맴돌며 이스라엘 외교관들을 표적으로 미리 계획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국은 밝혔다.
FBI 수사자료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는 21발을 발사해 두 사람을 살해한 뒤 “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가자를 위해 했다”고 자백했다.
피해자 리신스키는 대사관 중동·북아프리카 연구원이다. 그는 독일 태생이지만 16세에 이스라엘로 이민해 시민권을 얻었다. 밀그림은 미국인이다. 대사관 공공외교 부서에서 이스라엘 특사 임무를 담당했다. 그는 캔자스대 환경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아메리칸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땄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사건 직전 리신스키가 약혼식 프로포즈 반지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내에서는 두 사람을 향한 동정론이 일고 있다.
미국 내에선 지난해 가자전쟁 발발 이후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시오니즘(유대주의) 단체 반명예훼손연맹(ADL)이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반유대주의 사건은 9354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 이전보다 84% 급증한 1694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와 ADL은 공동 보고서에서 “가자전쟁이 발발한 지난해 10월 7일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서구 국가들에서 반유대주의 사건이 수십 퍼센트 포인트(P)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가자전쟁에 시종일관 강경론을 앞세우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번 살해를 “극악무도한 증오이자 반유대주의 행위”로 규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끔찍한 DC 살인 사건은 반유대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며 “미국에 증오와 급진주의가 설 곳은 없다”고 비난했다.
이번 사건으로 전 세계 이스라엘 외교공관들은 보안을 강화했다. 지난달 영국에서는 한 남성이 칼을 들고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침입을 시도했다.
이스라엘 기돈 사르 외무장관은 “전 세계 외교공관에 대한 추가 공격을 매우 우려한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이스라엘 대사관들은 조기를 걸고, 추가 경비 인력을 배치했다.
캐피털 유대박물관은 “필요한 모든 보안 조치를 취한 후 며칠 내 재개관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법무부는 로드리게스를 외국 공무원 살해, 1급 살인 2건, 강력범죄 시 총기 사용 등 혐의로 기소했다. 사형구형이 가능한 중대 범죄다. 예비 심리는 다음달 18일로 열릴 예정이다.
이번 총격 사건은 가자전쟁이 단순한 중동 지역 분쟁을 넘어 전 세계적 반유대주의 확산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네타냐후 정부와 밀월 관계에서 벗어나 중동 문제를 보다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이번 사건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가자지구를 폭격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 국제사회 여론 역시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19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공동 성명을 내고 “우리는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끔찍한 행동을 계속할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재개한 군사 공세를 중단하지 않고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제재도 해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에 대응해 더 구체적인 조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동정책연구소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이스라엘에 가자전쟁 종식을 압박하고 있는데, 이번 사건으로 미국-이스라엘 관계에 또 다른 복잡성이 가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